김영옥,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교양인, 2021.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이제 어머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한다. 아들은 노모의 이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이 시간을 카메라로 동행하겠다는 아들에게 그녀는 거의 호탕하게 말한다. “나는 미래를 구상하고 있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아들은 묻는다. “죽음에 관해서요?” 그녀는 대답한다.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해서. 죽음이라면 TV에서 보지 않니.”
시작부터 영화 [Twilight of a Life]는 의미심장하고 유머러스하다. ‘삶’의 마지막 시간과 임박한 ‘죽음’의 상관/갈등/관계를 무대 앞에 내세운다. 자신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겠다는 아들에게 94세 노모가 쐐기를 박듯이 강조한 저 말을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저 돼먹지 않은 카메라들이 빈번하게 찍어대고 전시하는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말에서 나는 이중 메시지를 듣는다. 죽음은 현실에서 내쫓겨 겨우 TV에서나 센세이셔널하게, 혹은 낭만화된 방식으로, 혹은 불편한 죄책감을 강요하면서 전시된다. ‘타인의 고통’을 승리감에 찬 태도로 이미지화하는 것에 대한 수전 손택의 경고는 죽음의 이미지화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재현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 불가능성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현현케하는 고뇌 어린 시도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다큐멘터리 속 노모는 죽음의 현현과 멀어진 현대인의 삶의 습관과, 고뇌가 삭제된 죽음 전시 모두에 간단명료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과거 아닌 미래”라는 것은 살아낸 삶의 부정이나 (정신분석이 말하는 ‘~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의) 죽음의 부인이 아니다. ‘나의 죽음’은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지금 여기에서 숨 쉬고 느끼고 행위하고 반응하는 ‘나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내내 유머와 에로스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
[Twilight of a Life]에는 삶의 화두로 삼기에 딱 맞춤인 지혜가 풍부하다.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는 책과 같다. 장면은 장면대로 다 정지시키고 싶고, 어머니와 아들이 주고 받는 말들은 말들대로 다 받아 적고 싶다. 편집을 거쳐 한 편의 드라마로 탄생했으니 감독이 ‘마 셰리(나의 사랑)’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어머니가 일관되게 이런 언어와 태도로 죽음의 문지방을 넘었으리라 보긴 어렵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파편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 즉 일종의 단자로 존재한다. 이 단자들은 긴 시간 삶을 살아낸 ‘늙은이’의, 그것도 죽음과 대면한 채 하루하루를 사는 늙은이의 지혜의 해저로 우리를 이끈다. 그 해저에서는 시간의 주름들 사이사이로 경구가 된 지혜들이 조개 속 진주처럼 은은히 빛난다. 진주 몇 개만 꺼내보자.
영화 속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 셰리’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들과 아들을/이곳을 떠나야 하는 어머니, 두 사람은 아리에스가 ‘길들여진 죽음’에서 설명한 대로, 떠나는/죽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남는 사람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아들의 경우는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역전된 죽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아들에게 ‘나의 사랑’을 떠나보내는 일은 이제껏 배워본 적이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알지 못하니 답답하다.”고 아들은 근심 어린 얼굴로 어머니에게 털어놓는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평생 배우며 살아왔는데… 알 것 같으면 이미 알았어야지… 뭘 새삼스럽게 새로 배우나.”이다.
잘 헤어지는 ‘법’은 평생 살면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설렘과 웃음, 고통과 눈물 속에서 겪어낸 경험들의 총합으로 우리 몸속 혈관을 돌고 있다고. 그러니 그냥 맞닥드리면 되는 거라고 노모는 말하는 것 같다. ‘~하는 법 ~가지’ 식의 자기 계발서가 끝도 없이 필요한 이 시대, 자기 계발 주체들의 시시포스 노력에 관한 명료한 코멘트가 아닐 수 없다. 노모가 아들에게 건넨 저 말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그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으리라. 그는 지금 이날에 이르기까지 (담배를) 피우고 (감자를) 먹고 (언론 기사를) 읽고 (노래를 ) 부르고 (춤을) 추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고 싸우며(!) 살아온 대로, 멈춤 없이 계속해서 그렇게 살면서, 자신의 삶을 채운 사물들이 있는 집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노모가 살고 있는 이 ‘사이 빛(twilight) 시간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라며 무언의 목소리들이 집단적으로 조언하는 화해나 내려놓음, 무심 등과는 거리가 먼 명랑함과 놀라움, 추구와 질문이 있다.
죽는 과정은 삶의 마지막 ‘사건’이다. 그가 살아온 삶과 그의 마지막 모습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존엄성을 구성하는 기본 개념이다. 삶이 그렇듯 죽음 또한 ‘개별적이고 유일한 개인’의 정체성 관점에서 배려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어떤 목적에 자신의 삶을 정향시켰는지, 자신이 정의한 자아 이미지는 어떠한지가 죽는 과정을 선택하는 데 핵심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인지 장애가 심해져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정체성에 따른 존엄의 존중은 돌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평소에 당신이 살아내는 일상에 죽음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당신의 모습이 깃들어 자리 잡는다’고 다큐 속 노모가 넌지시 전한다. 꼭 준비된 죽음이나 자연사가 아니라도 죽음은 그 죽음의 시점까지 살아온 삶 속에 이미 또렷한 형상으로 깃들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의 동시적 사유와 지각이 없이는, 지혜연할 뿐 정작 지혜와는 거리가 먼 빈정거림이나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께하는 삶이라는 풍요에 집중 (0) | 2021.11.14 |
---|---|
텅 빈 세상에서, 떠난 이의 글을 옮기다 (0) | 2021.11.13 |
나이듦에 같고도 또 다른 이야기 (0) | 2021.11.06 |
9월 1일은 여권통문의 날 (0) | 2021.10.31 |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 (0) | 2021.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