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텅 빈 세상에서, 떠난 이의 글을 옮기다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한 사람의 84년간의 결곡한 삶의 궤적이 이 한 권의 ‘편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철학자로, 생태주의자로, 또 언론인으로 수많은 논저와 기사에서 남긴 많은 글에 미처 담지 못했던 것이, 아니 단 몇 줄을 ‘잘못’ 썼던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아, 그 모든 글들보다도 훨씬 소중했던 아내에게 남긴 글이다. 글은 사람이다. 글쓴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구태여 췌언이 필요 없다. 이 편지를 읽으면 누구든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가 남기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부합하고자 한 진정한 양심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인간의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인 사랑에서조차도.
팔순의 고르 부부가 파리 동쪽 시골 마을 보농에서 한날 한시에 생을 마감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나는, 어느 날 학고재 손철주 주간이 이 책에 관해 얘기한 것을 계기로 그들의 삶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 부부의 동반자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아무리 그런 사정이더라도, 삶을 그리 인위적으로 버릴 만큼 독한 맘을 먹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십여 년 전 읽은 핀란드 작가 타우노 일리루시의 소설 [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이 생각났다. 불치병에 걸린 배우자에 대한 사랑으로 끝내 함께 죽음을 결행하는 그 소설의 마지막이 안쓰러우면서도 좀 섬뜩하게 느껴졌었기에, 이번 이야기를 듣고도 ‘아 여기 실제로 그런 부부가 있구나… 왜 아픔을 껴안고라도 주어진 삶을 끝까지 감당하지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받아들고 번역하면서(지금까지 이렇게 받자마자 단숨에 번역한 책은 없었다) 그런 생각은 바뀌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 숫기 없는 청년의 “춤추러 갈까요?” 라는 프러포즈로 시작하여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는 절절한 사랑고백으로 끝나는 이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 어느 부부가 이처럼 살고 이처럼 죽을 수 있을까? 어느 부부가 이처럼 사랑을 그저 수식어나 겉치레가 아닌 삶(또한 죽음) 자체로 구현할 수 있었을까? 태생적으로 어느 세상에도 뿌리내리지 못했던, 부재를 통해 실존할 수 있었던 앙드레 고르(그러나 이 어떤 이름보다도 도린의 남편 ‘제라르’로 살았던 남자).
공허와 무를 자기 것으로 체득하고 스스로 부재함을 즐기며 글을 쓴 그의 귓전에 끝내 맴돌던 노래.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만약 그가 이 가사 대신 이렇게 노래 불렀다면 어땠을까. “세상은 텅 비었으나 숨 닿는 데까지 살아보려네.”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아니다. 숨이 멈추는 끝을 스스로 정하고 이승을 떠난 그. 생의 고통을 자기 손으로 마감한 설정 또한 그가 타고난 인연(운명)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파리에서 동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진,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던 보농 마을에서 8천여 킬로미터 더 떨어진 이곳 서울에서 늦가을 낙엽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편지를 밤새워 한국말로 옮길 인연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지식인이 전 생애를 담아, 전 존재를 실어 간절히 쓴 이 편지를 번역하고서야 비로소 그의 저작 [에콜로지스트 선언]에 제대로 주목해보게 되었다. 고르는 [D(가장 귀한 그의 도린)에게 보낸 편지]로써 ‘dumb’하고 ‘dull’한 현대인의 일상을 깨워주기도 한 것이다. 인터넷이 창조하는 정보의 흐름이 사회를 주도하게 될 미래(우리의 현재)를 예견하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왜 끊임없이 더 많이 생산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문제는 소비의 증가 추세를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덜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일의 후손을 위해 자연의 축적물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이 이외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생태학적 리얼리점이다.”([에콜로지스트 선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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