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정치원리는 자유와 정의였다
열다섯 살의 어린 이 여학생은 불의에 대한 불복종과 항의가 얼마나 힘든 결과를 낳는지 체험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불의에 주눅 들지 않았다. 퇴학을 당한 후, 그녀는 가족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 대학에서 과르디니(1885~1968)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그녀는 신학과 키르케고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다시 돌아와 외부 학생 자격으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했다. 학교는 더 이상 그녀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1924년 다른 학생들보다 1년 먼저 졸업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고집이 세고 저항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지적인 이 여학생은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다.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한나는 처음부터 혁명가나 사회이론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실존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한나 아렌트가 사회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깨달으면서부터였다. 그녀는 독일 하노버 교외에 있는 린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나 아렌트는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대학 자격시험에 통과한 후 철학과 신학, 그리고 그리스어를 배우기 위해 마르부르크 대학교로 갔다.그녀가 이 대학으로 간 까닭은 ‘가장 현대적이고 관심을 끌었던’ 후설의 현상학, 그리고 완벽한 스승이며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강의를 처음 들을 때는 열여덟 살의 어린 여학생이었다. 그때 하이데거는 두 아들을 가진 서른다섯 살의 가장이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고, 그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하이데거에게 사랑을 느꼈다. 하이데거도 이 어리고 총명한 여학생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와 시에서 자신의 헌신을 표현했으며, 그녀의 사랑이 꽃피우게 했다. 아렌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가서 후설과 함께 연구를 했다. 그녀는 하이데거와 떨어져 있으면서 그와의 관계에 대해 반성했다. 그리고는 마르부르크 대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하이데거 밑에서 학위 논문을 쓸 수 없었다. 하이데거는 그녀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카를 야스퍼스에게 보냈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와 의기투합하여 철학을 개혁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아렌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두 철학자에게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아렌트는 야스퍼스와는 스승으로서, 나중에는 철학적 토론자로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69년 야스퍼스가 사망하자, 그녀는 몇 개월 동안 검은 상복을 입고 다닐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1933년에 하이데거가 나치당에 가입하자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1933년에 아렌트는 체코를 거쳐 파리로 망명한다. 파리로 망명하기전 그녀는 결혼을 한다. 상대는 마르부르크 대학교 철학과 동기인 유대인 귄터 슈테른이었다.
아렌트는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을 다룬 [라헬 파른하겐: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한다. 이 책은 1938년에 망명지인 파리에서 완성되어 1958년 미국에서 출간된다. 이 책에는 유대인 여성과 역사, 사회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중첩적으로 깔려 있다. 그녀는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 라헬의 인생 가운데 많은 부분에 공감한다. 그녀는 이 여인의전기에 자기의 심정을 이입해놓는다. 이 책의 밑바닥에는 독일인 하이데거와 유대인 여성 아렌트와의 사랑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하이데거의 주술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아렌트는 귄터 슈테른이 뉴욕으로 떠나면서 헤어지고 나서 두 번째 남편이 되는 하인리히 블뤼허를 만난다. 그는 1919년에 스파르타쿠스 폭동에 가담한 비유대인 공산주의자이자 독일 공산당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하인리히 블뤼허는 1940년에 전처와 이혼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아렌트는 프랑스에서 1933년에서 1941년까지 머무른다. 무국적자로서의 프랑스 생활은 안전하지 못했다. 1938년 봄, 프랑스 정부는 반 외국인 칙령을 공포한다. 1939년에는 적대 국가인 독일 국민을 감금하는 시행령을 실시한다. 1940년 5월에 블뤼허와 아렌트 부부는 체포되어, 아렌트는 에스파냐 국경 근처 귀르의 여자 수용소로 보내지고, 블뤼허는 행방이 묘연해진다. 모든 것을 압수당한 채 여자수용소에서 아렌트는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노자가 국경을 넘어가는 길에 쓴 도덕경에 관한 전설]을 되뇌며 희망과 위안을 받는다.
아렌트 부부는 리스본을 거쳐 1941년 5월에 미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10월부터 뉴욕에서 발간되는 독일계 유대인 주간지 [건설]에서 일했다. 유대사에 관한 글로 그녀는 미국의 시온주의자 사이에서 명성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로 시온주의자들과 함께 활동을 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치 원리는 자유과 정의였다. 이 원리는 시온주의의 본질인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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