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이춘아 2021. 11. 20. 21:14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도서출판 어크로스, 2018.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 [한니발] 3부작에서 창조된 괴물, 한니발 렉터는 마이클 만의 [맨헌터](1986), 조너선 드미의 [양들의 침묵](1991), 리들리 스콧의 [한니발](2001)을 통해 영화적으로 구현되어왔다. 한니발 렉터는 [맨헌터]에서는 정신병동에, [양들의 침묵]에서는 저 깊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한니발]에서는 탈출했으나 FBI에 쫓기고 있었다. 한때는 저명한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그가 쫓기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먹어치운 식인 살인마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죽이고, 인간을 먹으며, 인간에게 쫓기고 있는 인간이되 인간의 공동체로부터 추방된 셈이다. 

자신의 팔을 베는 한니발의 행위는 단지 스탈링에 대한 로맨틱한 사랑의 증표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니발이 자신의 팔을 자르는 행위는 그의 삶이 대단한 원칙과 질서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많은 도덕주의자들의 원칙이라는 것들이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헌신짝처럼 내던져져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보기 드문 원칙과 질서를 이 희대의 살인마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경이로운 체험이다. 기존 세계를 단순히 불평하거나 일탈행위를 일삼는 수준을 넘어, 기존 세계의 질서와 구별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독립적인 세계로 불릴 자격을 얻는다. 그렇게 볼 때, 한니발은 아주 심오한 차원에서 ‘진정한 개인’이다. 

하지만 한니발의 질서는 실로 기존 인간 세계의 어떠한 상식이나 관습과도 배치되는 것이다(우리가 인간인 한, 인간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습과 도덕이라고 할 때, 거리낌 없이 인간을 먹는다는 사실은 그가 관습의 대척점에 있음을 웅변한다). 한니발처럼, 광기와 일탈의 수준이 일상적 질서를 완전히 뛰어넘되, 나름의 내적 일관성과 질서를 획득하는 경우, 그 새로운 질서는 현재 우리의 도덕적 범주를 넘어선 어떤 곳에 있으므로, 그 포착되지 않는 성격을 일러, 미학적 질서라고 이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그것은 예술이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영화 [한니발]을 관주하는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특히 한니발의 살인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곡의 하나라는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한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다면, 만들거나 사들인 예술품이 예뻐서라기보다는, 아마도 예술이 개개인의 고양된 삶의 형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한니발은 그의 삶이 하나의 예술적 기초 위에서 진행되기를 원한다. 그의지식, 심미안은 모두 그 예술적 삶을 위한 재료다. 그는 오페라에 대한 대단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일상은 대단한 테이스트와 스타일로 채워진다. 그는 단테의 소네트로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한 사람을 죽일 때조차도 자신의 살인이 중세 처형사의 주석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가 한끼의 저녁식사를 위해 들이는 공을 보라. 그는 하나의 조촐한 디너 파티를 위해(비록 뇌를 구워 먹이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골동품상을 돌며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식기를 준비한다. 공들여 음식을 장만하고 식탁보를 준비하고 조화와 예의를 아는 이를 엄선하여 초대하는, 이 잘 준비한 저녁식사는 다름 아닌 그의 생을 예술적으로 고양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가장 상관하는 것은 늘 자신의 삶이며, 삶이란 저녁식사와 같은 일상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저녁식사 순간이 예술의 경지가 된다면, (바로 그 부분의)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한니발은 그러한 순간을 망가뜨리는 ‘무례한’ 놈들을 싦어하며, 그들을 먹어치운다). 즉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 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자아 창조의 과정은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켜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티테제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한니발이 사람을 먹는 한, 그는 그들 둘러싼 인간 세계와 끝없는 안티테제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니발 렉터의 경이로움은 단순한 세상과의 불화를 넘어, 자신의 생을 자신이 창조하는 예술의 무대로 만들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예식을 집전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한니발의 모습은,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예술을 통해 독립된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세상에 복수하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의 모습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