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쓴 부부독립운동가

이춘아 2021. 12. 11. 00:21

(사)역사여성미래, [부부독립운동가 열전], 역사여성미래 총서3, 2021.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쓴 부부독립운동가

부부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유형을 가족 단위로 조사, 검토하고 활동 내용은 물론 시기와 지역 등을 나눠 교차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의 독립운동을 재고찰해 보았다. 여성의 일이라고 규정되어 제한적으로만 여겨졌던 ‘살림’이 바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실천적 활동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한다면,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 딸, 며느리, 아내 모두가 바로 당시 여성독립운동가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따라 본문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1장. 독립운동을 ‘살린’ 독립운동가 부부
      1. 독립운동 ‘살림에 일생을 헌신한 이은숙과 이회영
      2. 미주 독립운동의 대부모 이혜련과 안창호
      3. 비타협적 독립운동가의 ‘상징’ 신채호와 그의 든든한 지원자 박자혜
      4. 독립운동가 가문의 가교가 된 김락과 이중업

    이들 중 이은숙을 제외한 세 명은 3.1운동에 참가한 것뿐 아니라 이후 단체 활동이나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혼하고는 남편이나 자녀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살림’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운동에 투신하기보다는 가족의 삶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했을 것이다. 그 일이 곧 민족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열정이나 능력 모두를 살림에 투자하였다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이들의 상황을 굳이 비교한다면 그래도 미주에서 활동한 이혜련의 상황이 조금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2장. 임시정부에 참여한 부부독립운동
       1. 중국관내 여성운동의 대모 김순애와 외교관 독립운동가 김규식 부부
       2. 임시정부 27년을 함께 활동한 정정화 김의한 부부
       3. 임정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연미당 엄항섭 부부
       4. 육아일기를 쓰며 임정의 선전활동에 앞장선 최선화 양우조 부부

   이들은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해방되기까지 임정의 주역이 된 남편들과 함께 임정의 의정활동이나 외교활동 등 임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또는 임정 산하 여성단체 활동으로 임정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한 여성들이다. 이른바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아 살았다는 정정화 등의 군자금 모금 등 헌신적 활동이 없었다면 임정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회의가 들 정도이다. 

3장. 의열 활동에 나선 부부독립운동가
     1.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끈 박차정 김원봉 부부
     2. 조선의용대원 이화림 이집중 부부
     3. 광복군 제3지대를 이끈 오광심 김학교 부부
     4. 광복권이 인연이 된 민영주 김준엽 부부

   의열 활동이란 몸을 던져 무장투쟁이라도 불사한 경우를 말한다. 이들은 임시정부와 함께 또는 따로, 남편과도 함께 또는 따로 자신들의 삶을 민족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부부를 일컫는다. 박차정과 이화림 등이 의열단 또는 의용대에서, 고광심과 민영주는 광복군에서 활동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무장항일투쟁을 통한 광복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4장. 사회주의 독립 운동 노선을 걸은 부부독립운동가
     1. 함께 또 따로 열정을 다한 허정숙 임원근 부부
     2. 불꽃같은 투쟁에 요절한 박원희 김사국 부부
     3. 민족통일전선을 꿈꾸며 활동한 김원경 최창식 부부

    4장의 부부들은 1920년대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민족해방,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섰던 부부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은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많은 민중여성들에게 항일민족의식과 투쟁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허정숙은 1920년대 근우회 등 여성단체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다 30년대 후반에는 만주에서 의용대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박원희 김사국 부부가 단순한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운동에 열중하다 일찍 병사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자신을 불사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투쟁 의식을 더 크게, 더 강하게 불러일으키는데 열정을 다하였던 것이다. 김원경은 1919년 4월 서울에서 이미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활동하다, 상하이에 가서도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부부가 같이 모스크바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192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인 단체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