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백제 미륵사지 탑의 비밀, 백제 무왕의 왕비는 누구인가?

이춘아 2022. 1. 2. 00:59

(사)역사여성미래, [문화유산으로 본 한국여성인물사] (역사여성미래 총서 2), 2021. 

백제 미륵사지 탑의 비밀, 백제 무왕의 왕비는 누구인가? 

선화공주의 존재는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정사인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 가락국 등의 기록뿐만 아니라 신라향가 14수가 실려 있는데, 신라 향가는 신라인이 남긴 당대의 기록으로 역사는 물론 종교, 문화, 민속, 언어 등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신라 향가 중 ‘서동요’는 백제왕인 서동과 신라공주인 선화의 만남을 전한다. 

[삼국유사]의 무왕의 출생과 관련된 일화를 살펴보면,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719~737)은 왕이 되기 이전에 서동으로 불렸다. 서동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이다.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가 못가에서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관계를 해서 낳은 아이이다. 서동은 왕이 된지 35년째 되는 해인 634년에 궁의 남쪽에 못을 만들고, 그 안에 방장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쌓았다고 한다. 서동의 출생과 관련된 못과 무왕이 조성한 궁의 남쪽의 못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사적 제135호)일 것으로 여겨진다. 

익산 미륵사지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다. 그간의 발굴을 통해 익산 미륵사지의 삼탑 삼금당이 있는 삼원식 가람 형태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미륵사지에는 2개의  석탑과 1개의 목탑이 있었는데, 이 중 목탑은 소실되어 없고, 서쪽의 석탑만 남아 있다. 국보 11호인 이 석탑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미륵사지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규모가 큰 석탑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훼손되고 유실된 부분이 많았다. 이에 석탑의 보존을 위해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체하고 수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의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작업 도중에 석탑의 초층 탑신의 내부에 있는 심주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 외호 1점, 사리 내호 1점, 금제 사리 봉영기 1점, 청동합 6점 등 9점으로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중 금제 사리 봉영기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가로 15.5cm, 세로 10.5 cm 크기의 금판에 음각을 하고, 그 위에 주칠을 더해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금제 사리 봉영기에는 639년(무왕 39)에 무왕의 왕비가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에서는 백제 무왕의 왕비가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하였다. 사택왕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무왕이 재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인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였고, 이를 명문으로 남겼던 것이다. 이로 인해 639년 당시 무왕의 왕비는 사택왕후임이 밝혀졌다. 

백제 무왕의 왕비가 [삼국유사] 무왕조의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인지, 미륵사지 서탑의 금제 사리 봉영기의 주인공인 사택왕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택왕후와 선화공주 모두 무왕의 왕비이며, 미륵사 창건의 주역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화공주와 사택왕후는 지위와 역할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백제 미륵사 창건의 주역은 누구인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제 사리 봉영기는 백제인의 목소리로 백제 무왕의 왕비의 이름과 미륵사 창건 시기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금제 사리 봉영기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는 기해년, 즉 639년(무왕 40)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왕후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당대의 백제인이 기록한 금제 사리 봉영기의 사료적 가치는 어느 것과도 비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대 신라인에 의해 불려지고 전해져 기록까지 된 서동요의 역사적 가치 역시 폄훼될 수는 없다. 

백제 무왕의 부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용과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무왕은 왕계이기는 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적법한 후계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왕은 이처럼 선왕의 적자가 아니라는 출신의 한계가 있었다. 이는 무왕의 즉위 과정과 즉위 후의 왕권에도 한계로 작용하였다. 

사택왕후는 백제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 사택왕후의 성인 사택씨는 사탁씨 또는 사씨로 기록한다. [수서] 백제전에서 백제의 유력한 8개의 가문, 즉 대성팔족을 열거할 때 사씨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사택씨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백제 후기의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사택왕후 가문의 정치적 입지와 경제적 역량은 무왕의 왕권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자산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택왕후는 미륵사를 창건하여 불법을 통하여 무왕의 권위를 절대화하고자 하였다. 사택왕후의 미륵사 창건은 왕즉불 사상에 기반하여 왕권을 신성화하고 불교를 통한 사회적 통합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둘 중 누가 무왕의 왕비로서 미륵사 창건의 주역이었던 것일까. 

[삼국유사] 무왕조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혼인한 직후에 서동에게 금의 가치를 알려주었고, 또한 백제 왕비로서 미륵사의 창건을 제의하였다. [삼국유사] 무왕조에서 전하는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공주였고,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이었다. 선화공주와 무왕의 혼인은 무왕의 즉위 전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2009년에 발견된 금제 사리 봉영기의 명문은 기해년, 639년에 미륵사가 완공되었음을 기록하였다. 639년은 무왕이 재위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완공 당시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왕후임을 알려 준다. 미륵사는 규모가 큰 사찰일 뿐만 아니라 무왕의 왕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중요한 사찰이었다. 미륵사를 창건한 이후에도 보수와 확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선화공주는 미륵사 창건의 발원자이고, 사택왕후는 미륵사의 완공자였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미륵사 금제 사리 봉영기를 통해 선화공주와 사택왕후가 모두 무왕의 왕비였고, 미륵사의 창건을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와 사택왕후는 무왕의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지원자이자, 백제의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고대 사회의 왕비는 왕과 귀족 세력의 접점에 위치한 존재였다. 왕비는 그가 속한 귀족 세력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왕의 정치적 협력자이자, 경제적 지원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왕비는 왕권의 신성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신앙의 주체였다. 

초기 고대사회에서 왕비는 숭배의 대상인 신모였고,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였다. 왕비의 신모와 사제의 역할은 왕의 신성성을 증명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불교가 수용된 후, 왕비는 사찰의 창건, 불상 및 탑의 조영을 통해 왕의 무궁한 통치와 국가와 왕실의 안위를 기원하였다. 

왕비는 왕과 귀족 세력 간의 연합에 기여하였고, 이를 통해 왕의 통치를 강화하는 정치적 지지 기반이 되었다. 또한 왕은 왕비를 통해 귀족 세력의 사회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고대 사회의 왕비는 사상적 지지자, 정치적 협력자, 경제적 지원자의 역할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