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녹차 향내 그윽한 보성의 광주 이씨댁

이춘아 2022. 3. 5. 07:14




신영훈 글. 김대벽 사진, [한옥의 향기], 대원사, 2000.

녹차 향내 그윽한 보성의 광주 이씨댁

녹차로 유명한 전남 보성의 옥암리에는 오랫동안 보성의 토반으로 머물던 광주 이씨의 종가집이 있다. 남쪽에 흔한 ㅡ자형의 홑집이 아닌 겹겹의 형태를 보이는 이 집은 강한 개방 성향을 보인다. 아울러 이 종가집의 안채 구성은 오늘 우리가 짓는 한옥의 평면 구성을 어떻게 해야 마땅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유형을 제시한다. 

종가는 이범재씨댁이다. 당년 82세, 호를 구당이라 하는 범재 옹은 스무 살에 의재 허백련 선생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필을 쉰 적이 없으시단다. 바자울(대 갈대 수수깡 등으로 발처럼 엮은 물건으로 만든 울타리)이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종가댁이 있었다. 골목 왼 편 담장 안에 사랑채가 있었는데 40년쯤 전에 훼철하였다. 사랑채 앞쪽으로 효자문이 있고 대문이 서 있었다. 지금 대문과 중문은 없어졌고 효자각도 마을 어귀로 옮겼다. 

마당에 들어서면 안채가 번듯하다. ㅡ자집 끝에 ㄱ자로 꺾인 부엌이 달렸다. 아주 개방 성향이 강한 구조인데 놀랍게도 홑집이 아닌 겹집의 구성이다. 통설에 따르면 남쪽에는 ㅡ자형의 홑집이 기본이라고 해서 그렇게들 알고 있는데 이 집에서 처럼 겹집인 수도 있어서 통설이 정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머리에서 보는 부엌은 사랑방에 딸린 것으로 가마솥을 걸고 쇠여물 쑬 수 있게만 시설되었고 정작 부엌은 찬방 뒤로 숨어 있어서 앞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흥미 있는 구성이다. 

이범재 화백 종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광주 이씨댁으로는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의 중요민속자료 제157호인 이금재씨댁과 제155호인 이용욱씨댁이 또 있다. 그 외에도 기와집들이 많은데 광주 이씨는 보성군의 토반으로 누대째 세거하면서 다수의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속언에 보성에 가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것도 이씨와 같은 토반에서 배출된 인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한다. 

이범재 옹은 9대째의 종손이기도 하다. 호를 무구재라 하는 희기(1701년생)공으로부터 쳐서 9대째이다. 광주 이씨의 시조는 고려충숙왕 때의 이집(1327년생)공이시다. 이분의 6대손인 이수관(1500년생)공은 퇴계 문하에서 학문에 열중하다가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깨닫고 보성 땅으로 낙향한다. 대곡리에 양진재를 짓고 후학들 훈도에 전념한다. 이분 때문에 보성 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해서 문중에선 낙남조(남쪽으로 낙향한 중흥시조)라 호칭한다. 그 일대에서 14대까지 세거하다가 희기공의 손자인 15대 이진록(1770년생)공대에 이르러 예동으로 이사한다. 

낙향하고 은둔하니 재산 또한 넉넉하지 못하였다. 진록공의 어린 시절은 더욱 그래서 처가에 의탁하고 지냈다. 처가가 예동에 있었던 것이다. 예동의 터는 인근에 명당으로 소문났다. 그래서인지 진록공은 중앙 정부에 진출하였고 절충장군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한다. 이로부터 가세가 펴기 시작하였고 예동에 광주 이씨의 기반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그의 아드님 이기동은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의 효행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표창한다. 지금 마을 어귀에 효자문이 바로 이분 때문에 생겼다. 

광주 이씨의 세는 더욱 뻗쳤다. 어느새 처가 일족은 영락하고 하나 둘 떠나서 마을은 이제 광주 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세력도 생겼고, 경제 능력도 생겨서 자손들 교육에 일념하였고 그래서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하였다. 이 마을엔 90세에 가깝거나 넘는 분들이 여러 분 살고 계신다고 하였다. 바로 이웃집인 이용우씨댁(중요민속자료 제163호)에만 가도 99세의 할머님과 97세의 할아버님이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가서 뵙게 해달라고 졸랐다. 

대나무와 바자울이 울타리를 이룬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 끝에 대문간채가 있다. 동향한 동대문이다. 대문간채 문간 옆은 지금 닭장으로 쓰고 있으나 원래는 측간이었던 듯싶다. 대문간채에 이어 헛간채가 있다. 디딜방아를 설치했던 방아실간과 외양간 시설이고, 측간도 설비되어 있다. 

헛간 앞에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돼지우리가 있다. 설명만으로는 납득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이만한 돼지우리가 또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세계로 다니며 본 돼지우리 중에서는 단연 제일가는 멋쟁이다. 여기에서 정서적으로 자란 돼지라면 그 맛도 또한 대단해서 잔칫날 풍미로서 찬탄을 들었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안채는 역시 ㅡ자형이고 겹집이다. 안채 맞은편 마당 끝에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앞마당을 정원으로 가꾸었다. 이 댁 안채 부엌도 앞에선 보이지 않는다. 왼쪽 끝의 찬방과 뒷방 사이에 부엌을 시설하였다. 부엌은 큰방(안방)에 이어지고 큰방과 부엌은 통하는 문이 있어 편리하게 되었다. 

큰방에 이어 4칸 대청이다. 앞퇴와 뒤퇴가 있다. 대청에 이어 작은방(건넌방)이 있다. 뒤로 1칸의 마루 깐 고방(세간을 넣어 두는 방)이 있고 앞엔 반칸의 퇴가 있고 측면으로도 다시 머리퇴가 생겼다. 이쪽에서 보면 고방이 뒤마당으로 1칸 돌출해서 측면이 앞퇴까지 3칸인 듯이 보인다. 

이 댁의 안채 평면 구성은 우리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오늘에 우리가 짓는 한옥의 평면 구성을 어떻게 하여야 마땅하겠느냐의 과제에서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 활용해도 좋은 구성이다. 이런 자료와의 연계는 오늘날 전통의 계승이라는 곤혹스러운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른 나라의 것을 적절히 도입하고 응용하였다는 지탄을 면하는 참신함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는 바깥으로만 열중하고 거기에서 이상형을 찾으려는 경향에 들떠 있었다. 이제 스스로를 돌아다보는 기운이 도래하면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것을 보는 일을 하고 있다. 부화하였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보는 눈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새롭다. 그만큼 우리의 집에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과 정감이 가득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