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과 그림
지난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 자신도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몰두라는 표현을 쓰긴 썼지만, 기껏해야 책들을 구해서 읽는 게 전부였다. 그때 나는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인쇄된 고흐의 그림을 붙여 놓은 집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고흐가 사용한 주관적인 색채에 감탄했다가 차츰 그의 살아온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료를 입수해서 읽는 일을 거듭한 결과로 마침내는 고흐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이, 내가 환히 알 수 있는 우리 아버지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어떻게 살았길래 이런 그림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히 풀리게 되었다.
고흐는 한창 때 1년에 200여 점의 유화를 완성했다. 그것은 사흘에 두 점의 그림을 그려 냈다는 계산이다. 연필 그림도 그렸을 테니까 고흐의 매일매일은 ‘잠과 그림’ 뿐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삶은 인사치레나 친선 방문, 취미, 도락, 여행 같은 것들이 끼여들 수조차 없이 그림과 잠으로만 꽉 차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게 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고흐처럼 몰두해서 살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올해 초가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펴낸 [세계현대미술제]라는 책이 나왔다. 별볼일 없는 책이겠거니 하고는 그 크고 무거운 책을 한쪽 구석에 밀어 놓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무심히 책을 들쳐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잠과 그림’뿐인 사람들이 그 속에도 많이 있었다. 개인전을 오십 번, 백 번, 백이십 번씩이나 한 사람들도 그 속에 있었다.
오십, 백, 백이십이라는 숫자가 충격적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십오, 이십 정도의 숫자에 익숙해 있었는데…. 나는 이제까지도 무례했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무자비하게 '잠과 그림’ 뿐인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무엇이든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을 때 마비를 통해 소멸되는 것일까? 고르게 쓰지 않으면 마비된다…. 몸…, 내 몸이…, 오십이 되어서 맨 먼저 쏠려든 데가 몸에 대한 생각의 덩어리 속이다.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작업실 문을 열었다. 고통 속에서는 어떤 그림이 나올까를 기대하면서 이젤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내 오른손과 팔, 어깨는 건강하니까, 내 왼손을 그냥 그림물감 튜브만 쥐고 조금씩 힘주어 눌러 주기만 하면 되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림 그리는 일 속에 몰두하려고 일부러 애를 썼지만 곧 그런 자신을 잊어버리고 과거의 습관 속으로, 그림 그리는 일상 속으로 쉽게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느낌처럼 다가오는 기쁨은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내 생애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기쁨. 그림 그리는 일 그 자체 속에 있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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