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여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나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도 ‘여기’밖에 없고 내가 보낼 수 있는 ‘때’는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시간에서도 ‘지금’밖에 없어요. 여기 아닌 그 어디에도 나는 있을 수 없고 지금 아닌 그 어느 때에도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만일 하느님을 만난다면 그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어제는 벌써 지나갔으니 없는 것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는 거예요. 있다 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는 나의 기억과 기대 속에 있지요. 만일 내가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형체 있는 것으로는 물론 형체 없는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서 지금 여기 아닌 엉뚱한 데를 헤매고 돌아다니며 공연한 번민과 고뇌를 자초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근심 걱정의 대부분이 지나간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이거든요. 1분 전 일도 지나간 과거요 1분 뒤 일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고 한다면, 99퍼센트의 걱정이나 근심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는 것들이겠지요. 따라서 가장 짧은 순간, 가장 좁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자유롭고 평안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무지 걱정 근심할 일이 없고 얽매일 곳도 없을 테니까요.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라는 말씀은 어제나 내일에서 찾지 말고 오늘에서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명상수련은 여기 아닌 다른 어디로 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가 있는 자신을 여기로 불러오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틱낫한선생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과, 다른 모든 사건도,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때와 곳은 오직 지금 그리고 여기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기야말로 하느님의 때와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고 모든 것이 그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따로 애쓰지 않아도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지금 여기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 몸입니다. 문제는 마음이예요. 좀처럼 지금 여기에 있지를 못하고 언제나 보면 거기나 저기에서, 지난날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날을 헤매고 돌아다니거든요. 그게 그러니까 저를 있게 한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근원에 닿아 있지 않으면 있는 것 같으나 없는 것이요, 산 것 같으나 죽은 것이지요. 대지에서 뿌리를 뽑힌 나무를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스승을 떠난 제자는 그 순간부터 제자가 아니지요. 제자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제자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를 떠난 마음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명상수련을 통해서 그 마음을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한다면 그 순간 죽었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공부란 내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로 되어 하느님의 때와 곳인 ‘지금 그리고 여기’로 돌아와서 머물도록,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이끌고 다스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께 “무엇이 깨달음입니까?” 하고 묻자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삶이 곧 붓다의 삶이라는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직 모를 뿐 (0) | 2022.03.27 |
---|---|
'오직 할 뿐’ (0) | 2022.03.26 |
몸으로 하는 마음공부 (0) | 2022.03.19 |
한국 고지도의 변천과정 (0) | 2022.03.12 |
고지도란 무엇인가? (0) | 2022.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