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오직 모를 뿐

이춘아 2022. 3. 27. 00:30

현각 엮음. 양언서 옮김, [부처를 쏴라 -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김영사, 2009.

'오직 모를 뿐'

뉴헤이번 선원에서 수행 중인 한 수학자가 영성과 지식의 관계를 숭산 큰스님께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성에서 지식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선을 이해하는데 있어 올바른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숭산 큰스님께서 물으셨다. 
“평화와 고요함이요.”
“평화? 평화가 뭡니까?”
“동요나 흔들림이 없는 것이겠지요.”
“나쁘지 않아요. ‘평화는 아주 좋은 말이예요.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진정한 평화란 무엇입니까?”

계산기를 사용할 때 계산기 판에 숫자가 이미 찍혀 있으면 다른 계산을 할 수가 없지요.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이 때문에 아래 부분에 C라고 쓰여진 단추가 있는 겁니다. 이 단추를 누르면 있던 숫자가 지워져서 0이 돼요. 그러면 계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맑게 하면 행복은 도처에 널려 있어요. 아이의 마음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완전한 평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늘 C 단추를 누르세요. 화가 나면 C 단추를 누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맑아져요. ‘모른다’는 마음이 C 단추를 누르는 그 마음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모른다’ 하는 마음으로 오직 곧장 나아가세요. 그러면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찰나 찰나 이 0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동안은 산이 눈앞에 나타나도 볼 수 없어요. 고통스러운 생각만을 볼 뿐이예요. 슬픈 마음에 집착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도 인식할 수 없어요. 생각만을 좇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순간의 세계를 놓치게 돼요. 나는 언제나 ‘생각을 하는 동안 눈을 잃어버린다.’ 고 말해요. 눈은 있지만 머리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들을 수도 없고, 제대로 맡을 수도 없고, 제대로 맛 볼 수 없고, 제대로 느낄 수도 없어요. 계산기에 숫자가 떡하니 찍혀 있으면 계산을 못하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에서는 찰나 찰나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칩니다. C단추를 누른다는 말이지요. 이걸 ‘오직 모를 뿐’ 이라고 말해요 

‘모르는 마음’은 모든 생각이 일체 끊어진 마음입니다. 모든 생각이 끊어질 때 마음은 텅 비게 돼요. 텅 빈 마음은 생각 이전의 마음입니다. 생각 이전의 마음은 본래 마음입니다. 계산기를 사용하려면 C 단추를 먼저 눌러야 해요. 그러면 화면에 0이라는 숫자가 뜹니다. 이게 텅 빈 마음입니다. 텅 빈 마음, 아주 중요해요. 텅 빈 마음 상태에서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0 곱하기 0은 0이고, 2 곱하기 0은 0입니다. 1,000 곱하기 0도 0이지요. 3 곱하기 0은 0입니다. 분노 곱하기 0은 0입니다. 욕망 곱하기 0은 0입니다. 마음이 0의 상태로 돌아가면 모든 게 0이 됩니다. 모든 게 텅 비게 돼요. 완전한 무에의 경지예요. 그렇게 되면 텅 빈 거울과 같은 마음이 이 우주를 있는 그대로 비추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어린이 같이 되어야 한다.’ 하는 가르침과 같아요. 아이의 마음은 텅 비어 있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즉 여여하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집착하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없고, 중생을 위해 살 수 없어요. 고통만 생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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