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눌림'에 대한 시적 저항
두번째 질문. 1980년대가 당신에게 준 그 영향을 당신은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 이 질문은 나에겐 난감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구체화시킨다는 것은 현실화(혹은 형상화)시킨다는 것인데, ‘어떻게’라는 방법 이전에 나 자신이 그것을 나의 시 속에서 구체화시키긴 시켰는가? 그리고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 이 질문을 작품 생산자 자신에게, 더구나 머리 나쁜 시인, 공부 안 하는 시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던진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부당한 처사인 것 같다.
앞서 나는 1980년대는(그리고 1970년대는) 내게 가위눌림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가위눌림을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자신이 그것을 구체화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나는 그 가위눌림에 대하여 시적 저항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저항은 강한 비명과 비탄, 과격한 에너지를 가진 어휘들과 이미지들의 사용 등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앞서 나 자신이 의식보다는 무의식,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많이 기대어왔다고 고백한 것은, 나를 짓누르는 그 가위눌림에 관하여 그것의 실체나 구조를 이성적으로 분석한다거나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못한 채, 무섭다고 싫다고 비명을 지르기만 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위에 눌려본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어떠한지 알 것이다. 내겐 잠을 청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잠만 들었다 하면 가위에 눌리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나의 데뷔 시 [이 시대의 사랑]도 그 시기에 쓰인 작품이다). 가위눌림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자, 그것으로부터 깨어나는 나의 방법 또한 몇 단계로 변화했던 것이 생각난다. 첫번째 단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에 휩싸인 채 본능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움으로써, 내게 극심한 육체적 아픔을 가해오는 가위눌림 속의 그 억압자를 쓰러뜨리고 깨어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온 힘으로 저항하다가 그 와중에 나 자신이 또다시 가위에 눌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리하여 이제는 공포감 없이, 싸우면 내가 이기도록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싸워 깨어나는 것이다. 세번째는, 가위눌림이 시작되자마자 그것이 가위눌림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그러나 경험으로 보아 어쨌든 간에 조만간 깨어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 억압자에 대한 저항 자체를 포기해버리고, 그러자마자 이상하게도 그 가위눌림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다.
당대의 , 그리고 개인사적인 가위눌림에 대한 나의 시적 저항의 형태는 아마도 내가 얘기한 첫번째 방법이었던 것 같다. 즉 그것이 가위눌림이라는 사실도, 그것의 실체도 명확히 의식하지 못한 채, 아픔을 가해오는 그 억압자에게 온 힘으로 저항하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그 비명은 도와달라는, 무섭다는, 싫다는 비명이다. 그런데 가위에 눌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아무리 소리치려 해도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얼마만큼의 힘을 쓰며 저항한 뒤에야 비명이 터져나오고, 그것이 자신의 귀에 들리게 되면서 비로소 그 가위눌림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