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죽은 자의 공간과 산 자의 공간

이춘아 2019. 8. 8. 09:07


죽은 자의 공간과 산 자의 공간

2002614일 파란하늘에 하얀구름

이춘아

 

 

1. 죽은 자의 공간

 

대전의 문화유산해설사들과 처음으로 서울나들이를 했습니다. 종묘와 국립중앙박물관 답사입니다. 자주 서울을 드나는 편이긴 했지만 모처럼 십여명이 함께 기차타고 가는 길은 마치 수학여행길 같습니다. 가랑비 오는 날이라 촉촉하게 젖어있을 종묘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나에게 종묘는 어떤 곳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버스 정류장 이름, 종로3가와 종로5가의 중간지점, 데이트 장소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던 곳이라 생각하니 괜히 신비한 이미지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기차안에서 오정 선생이 공을 들여 만들어 온 자료를 읽어봅니다. 그 중 죽은 자의 공간과 산 자의 공간 이라는 글자에 시선이 박힙니다.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공간인데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면 산자들이 찾아오고 죽은 자들이 찾아와 의례를 행하는 만남의 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날, 그 만남의 날을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만든 건축물이 종묘(宗廟)입니다.

 

죽은 자와 산자가 만나는 공간을 위해 건축을 하면서 산자와 죽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시켜 조형을 하였는데 건축 하나 하나에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길 때 종묘라는 우리의 문화유산은 빛이 납니다. 그것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는지 하는 것 까지도. 물론 종묘는 정전(국보 227), 영녕전(보물 821)라는 건축물 이외에도 종묘제례라는 의례 자체가 중요무형문화재(56)이며 종묘제례시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이 중요무형문화재 1호이어서 종묘는 건축양식에서부터 그 절차와 내용 모두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가랑비 내리는 종로길을 따라 종묘로 들어갑니다. 역대임금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정전과 영녕전이라는 두 개의 주 건물로 진입하기까지에는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목욕제개할 수 있는 부속건물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 옛날 언감생시에라도 그곳에 들어가볼 수나 있었을까만은 지금 우리에게 입장비를 내는 것이외에는 제재가 없습니다. 제사음식이 정결한지 판결하는 자리가 입구에 따로 만들어져있고 제사를 지내는 임금이나 세자들도 정전의 입구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자리가 따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바닥돌로 자리구분을 지워놓았습니다. 설명이 없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칠 것입니다.

 

종묘의 건축미학은 대비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주는 길에도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길은 길이되 산자와 죽은자를 대비하였고 구분하였습니다. 산 자는 어도(御道)를 따라, 즉은 자는 신도(神道)를 따라 정전과 영녕전이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됩니다.

 

신도는 인간은 다닐 수 없고 혼령만이 드나드는 길이고, 어도는 제사 담당자인 임금과 세자가 이동하는 의례의 길이라고 합니다. 신도는 전돌 두 개 폭으로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신령은 정신만 있을 뿐 몸체가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폭은 필요없고 방향만 지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정전과 영녕전 마당의 중앙을 관통하여 이어지는 외줄기 길이 신문입니다. 어도는 동쪽의 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게 설치되어 있어 임금이라도 남쪽 중앙의 신문을 지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도 임금이 들어가는 동쪽문으로 들어가 정전의 측면을 봅니다. 회랑같은 복도가 보이는데 그곳이 건물의 퇴칸입니다. 이 퇴칸이 정전건축의 기막힌 공간입니다. 신위가 모셔져 있는 굳게닫힌 대문 안쪽은 어둠의 공간입니다. 건물 바깥은 하얀 박석이 깔려있는 밝은 공간입니다. 어둠과 밝음 사이에 퇴칸으로 처리하여 어둠과 밝음,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전이공간인 것입니다. 역대임금의 신위가 칸칸으로 연결되어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나와 19실을 이루고 있습니다. 19실이 연결지워져있는 퇴칸의 회랑을 옆에서보면 기둥과 천장의 선이 대각선으로 한곳으로 모아지면서 정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종묘가 만들어진 시기는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왕조를 열면서 경복궁보다 먼저 만들어진 13955월이었으면, 태조의 선대 사조의 신주를 한양으로 옮겨온 것이 조선 종묘의 시초입니다. 이 당시 태실 7칸으로 창건되었던 정전이 1834년이 되면서 19칸으로 증축된 것입니다.

 

정전 19실에는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에서부터 철종 고종 순종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영녕전 16실에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 사조인 목조 익조에서부터 문종, 단종, 영친왕에 이르기까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정전 건너편 칠사당과 공신당이 있습니다. 공신당에는 역대 임금들의 공신 2-3명의 신위가 모셔져있습니다. 임금의 자리와 공신의 자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종묘의 건축물은 임진왜란때 전소되었다가 선조 41년에 다시 제모습을 찾았으나 곧이은 병자호란으로 또 다시 훼손되었습니다. 호란이 끝난 뒤 인조는 전후의 참상을 닫고 새로 나라의 체통을 세우기 위하여 종묘와 신주를 개수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신주 29위를 제조 봉안하고 파손된 신주는 종묘 뒤에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종묘는 영조, 정조, 헌조 시대를 거쳐 증축 개축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종묘 사직에 고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답사로 종묘는 내 마음속에도 커다랗게 자리한 정신적 공간이 된 듯 합니다. 언제 다시 한번 혼자서 조용히 종묘를 다시 찾아가려 합니다.

 

2. 산자의 공간

 

얼마전 문화의집 이라고 하는 곳들을 찾아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문화의집은 1996년 문화관광부가 시범적으로 짓기 시작하여 지금은 전국 100여곳이 넘는 만들어진 공공의 문화공간입니다. 100평에서 200여평 규모의 문화의집은 동네사람들이 편안하게 찾아가 책도읽고 음악도 듣고 토기를 빚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는 문화사랑방의 개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역주민들이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갈 수 있는 공간으로서 문화의집이 설립취지대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몇군데를 다녀왔습니다. 지역적으로 따지자면 전남, 경남, 경북, 충청,강원, 경기 지역의 열다섯 곳을 다녀왔습니다.

 

문화유산을 공부하면서 답사다니고 하였던 곳은 어찌보면 죽은 자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다녀왔던 문화의집은 지금 바로 여기에 산 자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여러곳을 다녀왔기에 제각각의 살아있는 공간들이 비교되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숨결을 불어넣는가에 따라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진 공간이 어쩌면 그렇게 다른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 새삼스럽기까지 합니다. 애정이 담겨있고 사람들의 냄새가 진하게 베어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방치되어 무료한 느낌을 주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습들이 달랐습니다.

 

거친 역사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죽은 자의 공간이 주관적일 수 있어 더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찾아가야하는 곳은 산 자의 공간입니다. 그 속에서 내가 살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곳을 외면하고 무심히 국보니 보물이니 중요문화재니 하는 것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 자신과 우리들이 바로 무형, 유형의 문화를 가꾸어가야만 나중에 문화재가 되어도 될 것이 아닌가 하는 되물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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