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서울문화유적

이춘아 2019. 8. 8. 09:08


서울문화유적

2002.9.4.

이춘아


[서울문화유적]이란 책이 있길래 목차를 훑어보던 중 동공을 확대시키는 목차의 제목의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 살던 집과 글씨'.

 

우암 선생께서 28세부터 82세까지 50여년간 걸쳐 나라로부터 부름과 임명을 받은 것이 무려 109차례나 되지만 이에 따른 것은 26회밖에 되지 않는다, 라는 대전문화유산해설사들이 알고 있는 전설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우암선생이 서울에 사셨던 흔적이 있으리라 생각을 해오지 않았던 터인지 더욱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우암 송시열선생이 서울에서 사셨던 곳은 종로구 명륜동 15번지 99호라고 합니다.

 

정리하여 베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우암길'을 따라 올라가면 전일의 보성고등학교 자리가 나오는데 이 학교는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섰다.

 

.......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서쪽의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가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표지인 '하마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이 비는 북묘가 있었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하마비를 지나 조금 가면 이곳 마을을 송동, 또는 송자동(宋子洞)이라고 하였다. 송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며 노론의 영수이자 효종때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송동은 서쪽 기슭에 있다. 우암 송시열이 옛날에 살던 곳이다.'라고 소개하고 있고, 이어서 바위벽에 '증주벽력'이라고 넉자를 새겼다. 우암의 글씨이다.

 

골짜기가 깊고 또 꽃나무가 많아서 봄에 상춘객들이 많이 찾는다. 바위벽 틈에 작은 청개구리가 늘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라고 씌어 있다. 현재 명륜동 15번지 9호의 개인주택이 세워진 암벽에는 송시열선생의 글씨가 남아있다.

 

이 글씨는 최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는데 암벽에는 [한경지략]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넉자가 크게 새겨져있다.

 

증주벽립이란 중국의 유학자인 증자와 주자의 말을 깊이 명심하겠다는 글귀이다. 즉 비록 천만인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니 나로 하여금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세워 놓았더라도 어찌 그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빛에 방해가 되겠느냐라는 마음 가짐을 내포하고 있는 글귀로 볼 수 있다.

 

송시열선생이 살던 집 터는 매우 넓고 그윽했는데 인근의 주택지는 물론 현재 서울과학고등학교도 그 울타리 안에 있었다. 현재 서울과학고등학교 운동장 서쪽의 천재암이라는 큰 바위 위에는 송시열 선생이 쓴것으로 전해오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송시열 선생은 이곳에 살면서 수시로 이 바위 위에 올라가 '이제나 옛날이나 다르지 않음'이라는 신념을 다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경룡(1997), [서울문화유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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