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구비 돌면 이게 뭐시여 바다가 나와
2003년 6월 22일
이춘아
2박3일이면 마치 우리나라 절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일치기 답사가 못내 아쉬웠지만 현실은 늘 하루로만 묶여있었다. 드디어 야심찬 2박3일의 답사가 있었고 결과는 ‘애개개’였다. 도대체 몇날이면 우리나라를 ‘그나마 좀 보았다’라고 할 수 있을까? 잠자고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차로 이동하면서 다녔는데도 기껏 강원도의 영월군, 정선군, 태백시, 삼척시, 강릉시 등 5개 시,군을 보았을 뿐이다. 시,군,구 단위의 지자체가 232개 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누다보면 46일은 다녀야한다.
관광(觀光)이라함은 마음의 눈으로 빛을 보는 것이라, 는 말을 늘 새기고는 있지만 다니다보면 홀려서 다니기 십상이다. 그 다음 다음 일정에 쫓겨 충분히 마음으로 담아내기도 전에 차에 올라야한다. 다음을 기약해보지만 사실은 언제 그곳을 또다시 찾아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일행 중 누구는 그랬다. 아마 평생에 다시 오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충남대학교 박물관이 2박3일의 여름답사로 일정을 잡은 곳은 그동안 당일로 다녀오기 힘든 강원도 일대였다. 보통의 가족들이 함께 여행하기에 힘든 곳을 택했다. 영월군 법흥사, 마애여래좌상, 김삿갓 묘, 정선군 정암사, 태백시 황지, 삼척시 너와집, 해신당, 환선굴, 이승휴 유허, 척주 동해비, 죽서루, 강릉시 굴산사지, 신복사지, 참소리박물관이었다.
여행을 다니는 기쁨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소위 교과서적인 삶에서 벗어나 그것이 진정 내 것이 되었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들이다. 내가 아는 김삿갓은 허구한 날 라디오에서 들었던 김삿갓 방랑기로 시작되는 성우의 음성이었다. 그가 왜 방랑을 하게되었는지 내아는 바 없었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김삿갓이라 불리었던 김병연의 묘 앞에서 허허로운 마음이 되어 먼 산을 올려다보며 그가 왜 시대의 풍운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지 그 사정을 알고 싶어 자료를 다시 읽어본다. 시대마다 풍운아가 없지 않았겠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와 시들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널리 같은 마음이 되었기에 역사적 인물로 남아 200년이 지난 우리들까지 그의 묘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정암사의 적멸보궁과 7층 모전석탑을 보기 위해 산길을 돌아돌아 올라갔다. 적멸보궁 앞길에 깔아놓은 바닥돌과 모전석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닥돌이 눈에 띄게 좋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적멸보궁과 석탑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을 위해 깔아놓은 바닥돌에도 정성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정성에는 반드시 아름다움이 덧붙여진다. 그 마음이 담겨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다시 찾게 된다. 이리보아도 좋고 저리보아도 좋고 마침 해지는 석양무렵이었기에 정신없이 사진기를 눌러댔다.
삼척시 신리에 있는 너와집에 갔다. 바로 얼마전 온양민속박물관 야외전시관에서 너와집을 보고 왔었다. 통소나무를 쪼개어 기와지붕 얹듯 송판을 올려놓은 것이 너와집이라고 한다.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본 너와집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다름의 정체는 그것이 있어야할 위치에 있는 것과 옮겨진 것의 차이였다. 그 차이가 그렇게 클 줄은 그곳에 와보고서야 알았다.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은 ‘이것은 너와집입니다’ 라는 것이고, 삼척 신리의 것은 ‘왜 너와집인가’ 였다. 교과서와 참고서격인 박물관을 아무리 본다한들 있어야할 자리에서 있는 현장을 확인한다는 차이는 엄청난 감수성의 간격을 벌여놓는다.
그 간격을 다시 실감한 것은 작년 강원도에서 일어난 물난리의 결과였다. 일년이 지난 지금에도 강원도 일대의 물줄기가 있는 곳은 어김없이 공사장의 돌들마냥 뒤짚혀있었다. 수재의 피해를 텔레비전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년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계곡과 하천을 피폐하게한 당시의 물난리 사정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음에 불구하고 공사장비가 부족하여 손도 못되는 곳이 허다하였다.
강원도는 산골이다 하였는데 구비구비 돌아나오니 이게 뭐시여 하면서 바다가 나온다. 같은 삼척시인데 한켠은 두메산골이고 한켠은 바닷가 마을이다. 해신당에 모신 처녀를 위해 동네사람들이 두릅엮듯 나무를 깍아 매달아놓은 남근목들을 보았다. 남근목의 전설 하나가 컨셉이 되어 해신당 주변은 남근목 전시장이 되었고 사람을 끌고 있다. 에그머니나 하면서 아줌마들은 그 옆에 서서 사진들을 찍는다. 바닷가는 온통 여신이다. 왜 그럴까. 그것도 처녀라야 한다. 서해안 심청이도 그랬다.
다시 산으로 들어가 천은사 아래에 있는 이승휴선생 유허로 왔다. 고려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서이자 대서사시라고 하는 [제왕운기(帝王韻記)]를 그곳에서 저술하였다고 한다. 유허지에 사당을 짓었으나 마당에 개망초들이 그득하다.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없이 방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유허(遺墟)라는 단어의 발음은 늘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대전시 동구 더퍼리에 있는 박팽년 유허에 비(碑)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답사갔던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너나할 것없이 엎드려 사당 마당의 개망초들과 잡초들을 걷어냈다.
삼척시 중심가에 있는 척주 동해비에 쓰여있는 허목선생의 글씨를 어두워가는 저녁햇살로 간신히 보았다. 전서체의 대가로 불리우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가 예술적이라 하여 보는데 충분히 감상하기에는 어두워가는 빛의 소멸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다음날 관동팔경의 하나라고 하는 죽서루에 갔다.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지어진 죽서루가 이제는 관동팔경에서 삭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노라하는 음유시인과 묵객들이 지었던 시들만이 그곳이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알려줄 뿐 오늘날 우리를 맞이한 오십천 주변은 난개발로 경치를 잃어버렸다. 거대한 암반을 주춧돌로 하여 올려세운 죽서루에 허목 선생이 쓴 ‘第一溪亭’ 현판이 무색하다.
작년 수재로 도로가 유실되거나 공사중인 곳이 많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다는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찾아가는데 한참 애 먹었다. 그렇게 큰 당간지주는 처음 보았다. 신라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굴산사를 오늘날 남아있는 당간지주 크기로 어림잡아 어마어마한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따름이다. 너른 들판의 우뚝 서있는 거대한 당간지주, 경주 황룡사지에서 보았던 주춧돌로 그 당시의 종교의 위세를 느껴볼 수 있다.
대전 대덕구 동춘당고택 사랑채에 선락재(宣樂齋)라는 현판이 있다. 즐거움을 널리 알린다, 라고 풀이해본다. 그 자리에서 함께 갔던 어느 분이 내게 물었다. 음악(音樂)이 무엇이냐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설명을 해주셨다. 음이 손가락끝까지 전달해오는 전율을 즐기는 상태라고 하셨다. 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어우러지는 소리가 손가락끝까지 즐거움을 줄수 있다면, 그 느낌을 강릉 참소리 박물관에서 느꼈다.
40여년간 60여개국을 다니며 축음기며, 레코드판 등을 수집해온 손성목 관장의 노력으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박물관이 되었다는 것도 대단해보였지만 박물관 안내 마지막 코스로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음악은 마치 우리를 공연장에 앉아있는 것 처럼 느끼게 하였다. 축음기의 발전은 생음악을 재현해보려고한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음(音)을 추구해온 인간의 의지이기도 하다. 제대로된 음악(音樂)을 우리는 그곳에서 느꼈고 기쁨의 눈물을 스스로에게 선사해주었다. 이 나이에 기쁨으로 눈물이 흘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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