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
(282~292쪽: 후기)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고 안중근의 거사 이후 그의 직계가족과 문중의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시련과 굴욕, 유랑과 이산과 사별에 관한 이야기다.
안중근(1879~1910)
안중근의 거사 이후 팔십 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안중근의 행위를 역사 속에서 정당화하지 않았고 교리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1910년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날 미사의 강론에서
-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는 대희년을 맞아서 ‘쇄신과 화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하고 한국 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문건은 한국 교회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안중근 현양 사업을 선도적으로 전개해왔다.
1945년 광복 이후에 김구는 여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안중근의 유해를 발굴해서 봉환하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그후로 정부와 민간의 유해 발굴 노력은 계속되어왔다. 2006년 남북한이 합동으로 발굴단을 구성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그후로 유해의 행방에 관한 유의미한 정보는 없다.
1946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36주기를 맞아 서울운동장에서 십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1946년 7월에 김구의 주도하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이봉창 묘 옆자리에 안중근의 가묘가 마련되어서 유해가 봉환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덕순(1879~1950)
우덕순은 출감 후 만주로 가서 대종교에 참여해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우덕순은 광복 후 귀국해서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현양 사업을 펼쳤다. 우덕순은 1950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안분도(1905~1911)
안분도는 안중근의 장남이다. 본명은 우생이다. 안중근의 거사 후인 1909년 11월7일 관동도독부 검사 미조부치는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다섯 살인 분도를 신문하고 청취서를 작성했다. 분도는 이때 어머니 김아려와 함께 하얼빈에 와 있었다.
안중근은 아내 김아려와 어머니 조마리아 앞으로 작성한 유서에서 장남 분도가 자라면 천주교 신부가 되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안중근 일가는 안중근의 거사 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분도는 흑룡강성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김아려(1878~1946)
1894년 안중근과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다. 안중근의 거사 후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 상해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1910년에 남편 안중근이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인 1911년에 큰아들 분도가 일곱 살로 만주에서 죽었다. 1939년, 1941년에는 둘째 아들 안준생과 맏딸 안현생이 총독부의 기획에 이끌려 서울에서 '북문사 화해극’을 벌였다. 김아려는 중일전쟁 이후에 상해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6년 상해에서 죽었다. 김아려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김아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조마리아(1862~1927)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의 모친. 안중근의 거사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고, 그후 다른 유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조마리아의 생애에 관해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항일혁명가들은 조마리아의 애국심과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고 있다. 조마리아는 1927년 상해에서 죽었다.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이토는 사후에 도쿄시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의 묘지에 묻혔다. 1932년에는 이토의 명복을 빌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가 서울 장충단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순직한 무관들을 제사하는 자리였다.
박문사 건립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제창으로 시작되었고 조선과 일본에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조선의 모금 목표는 이십만엔이었고 이 액수는 각 도에 할당되었다. 조선 왕궁인 경희궁 흥화문을 옮겨서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1973년에 박문사 부지는 삼성 재벌에 매각되었고, 이 자리에 1979년에 신라호텔이 건립되었다.
1938년에는 메이지 헌법 공포 50주년을 기념해서 일본 국회의사당 중앙 광장에 이토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 밖에도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이토 기념관, 하가시의 이토 고택, 시모노세키의 청일전쟁 강화 기념관 등에도 이토의 동상이 세워졌다.
빌렘(1860~1938)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순으로 가서 처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빌렘은 안중근의 거사를 이해하고 지지했다기보다는, 성직자로서의 종교적 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뮈텔 주교는 빌렘에게 이 개월간의 성무 정지 처분을 내렸다. 빌렘은 뮈텔 주교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파리 외방 전교회와 교황청에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후로 빌렘과 뮈텔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빌렘은 1914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빌렘은 모젤 지방의 사랄브에서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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