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수 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사계절, 2022.
(93~102쪽)
‘진주문고’ - 책과 사람이 만나는 우리 동네 문화공간
책방지기: 여태훈
후천적 장애인인 내게 책방지기는 어쩌면 운명의 직업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 이후 장애인에 대한 사회 인식과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를 몸소겪으며 성장했다. 차이는 인정하지 않고 차별만 엄존하던 시대에 장애인을 향한 거대하고 견고한 편견의 벽과도 싸워야 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난 1982년, 나는 재수까지 해가며 대학에 들어갔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공부는 뒷전이고 4년 내내 최루탄 가스 희뿌연 교정에서 돌과 화염병이 난무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우리 세대에게 학교 앞 책방은 정의와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열혈 청년들의 안식처이자 해방구였다.
학교 강의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 교양 전공과목 관련 교재는 거들떠보지 않으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금서를 찾았고, 갈 때마다 업데이트된 필독 금서 목록이 있던 곳. 마음 맞는 친구와 따르고 싶은 선배를 만난 곳. 그 치열한 격변의 시절 내내 책방 주인과 우리는 한패가 된 운명공동체였다. 이 특별한 경험은 나의 진로, 즉 밥벌이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장애인의 직업 선택에는 한계가 너무 많아 공무원이나 자영업 외엔 별다른 여지가없었다. 애초에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도, 될 자신도 없었기에 나는 졸업과 동시에 큰 고민 없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진주로 돌아와 책을 파는 서점인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책방 인생이 올해로 만 35년이다. 대학가 사회과학 전문 책방으로 첫걸음을 떼고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크고 작은 부침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육체적 한계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삶 자체가 절박한 현실주의자인 나는 경제적 논리뿐만 아니라 지식과 문화, 지역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책방을 통해 구체화했다. 시간이 흐르며 변신과 변화를 통해 책방은 덩치를 키워갔다.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외줄타기 같은 모험을 하며 책방을 운영하는 동안 고비마다 새로운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좋은 시절을 만나 운 좋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책방에서 새 책을 만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줄거움이자 아픔이었다. 매일 출판사에서 만든 새 책을 선보이는 책방은 명멸하는 책의 역사를 마주하는 현장이다. 책은 그 책을 쓴 사람의 농축된 사고를 넘어 한 우주를 넘나들게 한다. 책방에서 다양한 책과 많은 사람을 만나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덕분에 넓고 깊은 우주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던가. 책 한 권이 만들어져 유통되는 지난한 과정이 무색하게 책방에는 냉정한 시장 논리가 작동한다. 예전에는 새 책이 나오고 한 달 동안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곧바로 출판사로 반품되어 파지나 중고 책 신세가 되었다. 요즘은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단 며칠 사이에 운명이 갈려 저자와 출판사, 책방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애정과 기대를 받고 세상에 태어나 평범한 생로병사 단계를 거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책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피하고 싶은 고통이다. 혼자서 시작한 책방이지만 어느 지점을 통과하니 이미 내 손을 떠났음을 감지했다. 두꺼운 책만큼이나 켜켜이 묵은 35년. 얼마나 많은 발길이 이곳을 드나들며 자신의 인생 한 페이지를 찾아 밑줄을 그었을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발길들 덕분이었고 앞으로 남은 서점의 삶도 그 마음들이 결정한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따라 책방도 언젠가는 그 생을 마감할 것이다.
격변하는 세상을 보노라면 내일 당장 책방이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책방이라고 세상 흐름을 거역할 수 없으니 매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해보려고 한다. 그러다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또 운명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어느 순간 나도 책방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책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책과 함께 일생을 보낸 사람의 마지막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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