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영중, [매핑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2021(2019 초판)
(16~29쪽, 머리말)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30대의 대부분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냈다. 유형 이후 트베리에 잠시 머물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유럽에 다녀왔다. 도박 중독에 걸려 독일 카지노를 배회했고, 버거운 친척들과 빚쟁이를 피해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전전했으며, 천식 치료를 위해 독일 온천장에서 요양했다.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스타라야 루사라는 작은 온천 마을에서 여름을 보냈다. 러시아 문학을 통틀어서 도스토옙스키만큼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역마살도 이런 역마살이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것은 대부분 그의 의사와 무관했다. 시베리아 유형과 도박 중독과 천식을 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숙명적인 이동은 예외없이 그의 작품 속 서사의 일부로 굳어졌다. 시베리아는 [죽음의 집의 기록]과 [죄와 벌]에, 모스크바는 [백치]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미성년]에 이르는 수많은 소설에, 유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백치]와 [악령]에, 트베리는 [악령]에, 스타라야 루사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실제의 공간과 지명은 그의 문학 속으로 들어와 때로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때로는 저자의 의도를 전달해 주는 비유이자 상징이 되었다. 지도 위의 랜드마크는 시간의 사건으로 전이되었다. 특정 공간을 따라가는 저자의 이동 궤적은 소설 속에서 사상의 움직임으로 복제되면서 놀라운 역동성의 문학을 창출했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의 물리적인 이동과 정신적인 움직임을 동시에 살펴보고자 했다. 대문호가 실제로 살았던 도시, 머물렀던 지역, 방문했던 나라를 따라가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생각과 그의 펜 끝에서 흘러나온 글을 추적하고자 했다. 국경을 넘고 교차로를 지나가고 다리를 건너가며 시간, 공간, 인간을 축으로 하는 도스토옙스키 ‘지도’를 그려 보고자 햇다. 그래서 제목에 ‘지도map’에서 파생된 단어 ‘매핑mapping’을 집어넣었다. 이 책의 ‘매핑’은 실질적인 지도와 형이상학적인 지형도 모두를 함축한다.
2018년 1월 첫 주부터 12월 마지막 주까지 1년 동안 매 주말에 작가론과 평론과 수필을 뒤섞은 여행기를 총48회 연재했다. 정해진 마감 시간에 맞추어 동일한 분량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것은 어렵지만 매혹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장거리 마라톤에 뛰어든 심정이었다. 선도를 달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완주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나는 완주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연재는 새로운 차원의 글쓰기였다. 편안한 주말 아침에 칙칙한 인상과 긴 이름의 러시아 문호를 독자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슨 체포니, 유형이니, 중독이니, 간질이니 하는 것으로 점철된 신산한 인생과 수천 쪽에 이르는 소설에 관해 무려 마흔 여덟 번의 글을써야 했기에 나는 1년 동안 독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주말에도 이렇게 무거운 얘기를 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게 내 본심이었다.
그런데 독자의 눈치를 보는 동안 나는 점차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나를 사로잡게 된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어디에 가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가 나에게, 독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였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살았던 작가가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도시에 관해 쓰건, 대문호의 어떤 소설과 어떤 인생 사건에 관해 쓰건 나의 생각은 이 근원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과정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여행이었다. 결국 이 책 [매핑 도스토옙스키]는 도스토옙스키의 의미를 찾아 나선 내 여행의 기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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