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찍기 위해 다시 본 영화

이춘아 2022. 10. 28. 22:46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이지수 번역), 바다출판사, 2021.

(186~197쪽)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출연한 카트린 드뇌브의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입니다. 이 영화가 카트린 드뇌브라는 배우와의 만남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련된 영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압도적인 작품이지요. 특히 좋아하는 건 라스트신. 눈 오는 주유소 장면입니다. 슬픔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죠. 뮤지컬 영화라서 노래도 물론 좋지만 영화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작품입니다.

처음 본 건 학생 때네요. 40년 가까이 지났으니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그 무렵에는 카트린 드뇌브라는 배우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고, 프랑스 여성 배우 중 에서 오히려 잔 모로를 좋아했습니다.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등에 나왔죠. 누벨바그로 프랑스 영화에 입문했을 때 그 시대의 뮤즈는 잔 모로였습니다. 굳이 한 사람을 고르자면 당시에는 잔 모로에게 더 끌렸던 것 같아요. 잔 모로가 더 프랑스 배우스럽죠. 작가성 강한 작품에 자주 출연해서 더욱 그렇게 느꼈나 봅니다. 배우로서는 드뇌브가 좀 더 주류에 가까우니까요.

장 르누아르의 ‘황금 마차’는 프랑스 영화 10편을 고르라고 하면 반드시 넣는 작품입니다. 본 시기는 사실 서른 넘어서였어요. 장 르누아르의 영화는 축제 느낌이 납니다. 인간과 인생을 축복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좋아요. 이탈리아 유랑극단의 여성 배우 이야기라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만들 때도 다시 보며 참고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주연을 맡은 안나 마냐니는 이탈리아 배우인데, 드뇌브도 줄리에트 비노슈도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로 꼽을 정도입니다. 정말 멋진 배우지요.

고전을 또 꼽아보자면  자크 베케르의 작품이죠. 제가 베케르를 좋아하는 건 의외라고 여기실 수도 있지만 ‘앙투안과 앙투아네트’도 좋아하고, ‘현금에 손대지 마라’ 역시 근사합니다. ‘황금투구’도 좋고요. ‘황금투구’는 제 어머니가 좋아했습니다. 주연인 시몬 시뇨레의 이름을 저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죠. 베케르의 작품 중에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고르기 힘들지만, 한 편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구멍’이겠지요.

‘구멍’은 소리가 정말이지 압도적입니다. 소리와 행위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예요. 교도소에서 탈옥한다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구멍을 파는 것만으로 영화가 완성된다는 놀라움. 그 콘크리트를 뚫는 소리의 굉장함. 탈옥물 하면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도 유명하지만 저는 ‘구멍’이 좋습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촬영에 쓴 주인공 파비안느의 집 뒤편에는 상테 교도소라는 진짜 감옥이 있는데, 그곳이 ‘구멍’의 무대가 된 곳이래요. ‘구멍’은 그 교도소에서 실제로 일어난 탈옥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영화 도입부에 탈옥한 남자가 등장해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저의 실제 경험담인데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파비안느의 전 남편 피에르가 사위 행크에게 “가스파르는 믿어선 안 돼”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가스파르’는 ‘구멍’에 등장하는 탈옥범 중 한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죠.

같은 세대라면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여름의 조각들’도 좋아합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도 촬영을 맡았던 촬영감독 에리크 고티에의 솜씨가 훌륭하죠. 집 안에서 카메라를 움직이며 찍을 때, 카메라용 레일을 깔고 찍는 게 아니라 이동차라는 타이어가 달린 손수레에 카메라를 싣고 그것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찍거든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준비하며 다시 봤을 때, 이번에 한다면 이 촬영 방식이 가장 적합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영화가 일본 영화와 가장 다른 점은 집 안에서 사람이 바닥에 앉지 않으니 기본적으로 움직임이 훨씬 격렬하다는 것입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카메라도 얼마든지 움직이는 것이 지금의 고티에 스타일이에요. 하지만 별로 덜컥거리는 느낌도 안 들고, 사람의 움직임에 잘 맞춰서 카메라가 움직입니다. 그 점이 ‘여름의 조각들’에 정말로 잘 나타나 있어요. ‘여름의 조각들’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과 마찬가지로 한 집 안에서 스토리가 펼쳐지는데, 그 집으로 자식들이 돌아온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비노슈가 맡은 캐릭터가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설정이라 그것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과 비슷하지만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점을 너무 강조해 그 부분은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합니다.

또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과 관련된 이름을 들자면 클로드 샤브롤. 사브롤도 그 이름을 말하면 이른바 시네필로 여겨지기 쉬워서 평소에는 언급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도살자’처럼 근사하면서도 아주 히치콕스러운 영화가 많은 가운데 이번에 다시 보고 재밌었던 건 ‘여자 이야기’입니다. 전쟁 중에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여자 이야기인데, 그 역할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훌륭해요. 위페르와 샤브롤의 호흡이 찰떡이어서 샤브롤이 뭘 바라는지 위페르가 아주 잘 알죠. 감독과 배우 사이에 일체감이 있어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는 파비안느가 라이벌 배우 사라로부터 역할을 빼앗아 두 번째 세자르상을 받은 영화가 나옵니다. ‘언젠가’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이미지의 토대가 된 것이 ‘여자 이야기’예요. 또 샤브롤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전부 액션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전입니다만, 영화로서의 의미 그 이상으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이 쥘리앵 뒤비비에의 ‘하루의 끝’입니다. 은퇴한 배우들이 모여 있는 양로원 이야기예요. 한 번도 무대에 선 적이 없는, 대역밖에 맡은 적 없는 남자도 있고, 플레이보이라서 염문을 자자하게 퍼뜨린 끝에 그곳에 이른 미남 배우도 있어요. 그 배우와 한때 연인 사이여서 아직도 좋아하지만 그의 기억에서는 잊힌 할머니도 있고요. 이 작품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찍으면서 다시 봤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만드는 내내 머리 한구석에 있었습니다.이것도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봤어요.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보면 의외로 어머니와 본 영화가 기억에 짙게 남아 있네요.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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