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상아탑을 나온 우리는 조국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이춘아 2023. 1. 18. 08:24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 한길사, 2012.

(103~118쪽 )

1937년 7월7일, 동북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베이징 교외에서 중국군과 무력 충돌했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텐진의 난카이대학은 7월29일과 31일, 일본군의 두 차례에걸친 폭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특히 31일은 공중에서 폭탄을 퍼붓고 100여 명의 일본 기병이 휘발유를 가득 실은 군용차량 2대를 몰고와 도서관과 교수 숙소, 학생 기숙사를 불구덩이로 만들어버렸다. 대학의 상징물이었던 1만 2천근짜리 종도 행방이 묘연했다. 그래도 교장 장보링은 학생들 앞에서 불굴의 민족정신을 강조했다.

“적들의 폭격으로 훼손된 것은 난카이대학의 물질들이다. 난카이 정신은 오늘의 좌절을 딛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나는 물질의 손실을 염려하지 않는다. 본교의 건학이념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계기로 삼겠다.” 중국군이 흔적을 감춘 베이징에 들이닥친 일본군은 베이징대학 지하실을 일본 헌병대의 고문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밤마다 비명소리가 건물 밖으로 흘러나왔다. 노년의 대학자 천싼리는 아들 천인커에게 피난을 지시하고 “국가의 치욕이다. 기절을 중요시하는 것이 중국 사대부의 전통이다”며 절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천인커는 부친의 장례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일본대사관이 보낸 만찬 초청장을 무시하고 베이징을 떠났다.

칭화대학 교수 원이둬는 이탈리아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시인이었다. 7월7일 일본군과 무장충돌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부인에게 “피하는 것은 가정에 득이 안 된다. 안전만 추구하다 보면 국가에 도움이 안 된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피난을 망설였지만 일본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배 안에서 우연히 시인 장커자와 조우했다. 장커자는 간편한 원이둬의 피난 보따리를 보고 책들을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원이둬의 대답은 간결했다.

“ 제 나라 국토를 잃고 피난이나 가는 놈들이 책은 봐서 뭐하느냐!” 수천 년간 이민족에게 국토를 유린당하면서도 교육을 중시하던 민족이었다. 최고통치자 장제스의 전시 교육정책도 간단명료했다. “전시일수록 교육은 평소와 다름 없어야 한다.”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70여 개의 대학을 이전했다. 국립인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사립인 난카이대학도 후난성 창사로 이전했다. 이들은 연합에 합의하고 1937년 11월 1일 웨루서원에 ‘국립창사임시대학’을 설립했다. 교수 148명, 학생 1,452명이었다. 그해 말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도살을 감행한 일본군의 창사 공습은 무자비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임시 대학은 더 안전한 자리를 물색했다. 시난에 위치한 윈난성 쿤밍으로 학교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쿤밍은 기후가 사철 봄날이고, 철도를 이용하면 해외 왕래가 수월한 곳이었다. 전시 교육장소로는 최적이었다. 1938년 2월 중순부터 이전이 시작됐다. 학생 875명이 지원했다. 용감하고 성격이 급한 학생들은 군에 지원하거나 낙향했고, 꿈을 좇는 학생들은 혁명 성지 옌안으로 떠난 뒤였다. 체력이 약한 여학생,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은 기차로 광동을 거쳐 홍콩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월남을 경유해 쿤밍에 도착했다.

남학생 244명과 교수 10여 명은 쿤밍까지 보행단을 조직했다. 민심파악, 풍토조사, 표본채집, 신체단련이 목적이었다. 현역 육군중장 황스웨가 직접 보행단을 인솔하고 후난성 정부는 녹색의 군복과 일용품을 제공했다. 2월 19일 초저녁, 보행단은 웨루서원을 출발해 상강을 건넜다. 900여 년 전 후난 순무 주희가 스승을 사별한 웨루서원의 원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과 후 밤마다 배를 저으며 건너던 바로 그 강이었다. 대도시의 대학생활에 익숙했던 보행단은 행군과정에서 상상도 못했던 시련을 겪었다. 모든 악조건이 이들을 엄습했다. 일본군이 퍼부어대는 폭격을 목격했고 악천후에 시달렸다. 해충에 물리지 않은 곳이 없었고 발은 물집투성이었다. 보행단은 이동하는 대학이었다. 후일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성장한 런지위는 연일 울먹거렸다. “상아탑을 나온 우리는 처음으로 조국이 무엇인지를 인식했다. 얼마나 빈곤하고 큰 나라인지를 그제야 알았다. 평소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여겼던 아편장수나 하층민도 나라 잃은 백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침략자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불복종의 기세는 우리를 교육시켰다. 우리는 이들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중국은 망하지 않는다.”

런지위는 쿤밍에 도착하면 철학사를 전공하기로 작정하였다.

장정 도중 함께한 체험은 상이한 전통을 자랑하던 세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융합시켰다.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한 뒤에 1938년 8월 국립시난연합대학은 정식으로 설립을 선포했다. 전란 속에 태어나 8년간 존속한 시난연합대학은 비록 유랑대학이었지만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학부였다. 시난연합대학은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를 교과목에 넣는 데는 동의했다. 단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학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교육부의 교수자격 심사를 거부했고, 학장들은 필히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도 응하는 교수가 없었다. 판자집에 양철지붕을 덮은 기숙사와 교실, 실험실 등 82채의 건물을 짓는 데 1년이 걸렸다. 윈난성 주석 룽위의 지원을 받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창문에 유리는 끼지 못했다. 그래도 기후가 온화한 지역이라 큰 불편은 없었다. 설계자도 량치차오의 아들인 세계적인 건축가 량스청이었다.

교수들의 생활은 빈곤했다. 빈곤보다 더 두려운 게 일본군의 공습이었다. 1938년 9월 1차 쿤밍공습이 있었고 1940년부터 1943년까지 3년간은 공습이 빈번했다. 수업 도중 경보가 울리면 교수나 학생 할 것없이 모두 후문에 붙어 있는 뒷산으로 냅다 달려야 했다. 공습경보와 함께 뛰어 달리는 것은 교수와 학생의 공동필수 과목이었다.

경보가 긴 날은 산속에서 수업을 했다. 진웨린은 산으로 뛰는 도중 67만 자에 달하는 [지식론]의 원고를 분실했다. 다시 쓰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1941년 8월 공습으로 기숙사 식당 도서관이 파괴되자 교수들 대부분이 교외로 이사했다. 물리학과 교수 우다유는 마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오다 굴러 떨어져 뇌진탕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마차를 타고 나와 토굴 속에 손수 만든 실험실에서 수업을 강행했다.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키워낸 제자들 가운데 양전닝과 리정다오는 1957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류원덴은 고전의 대가였다. “중국 역사상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두 명 반뿐이다”라고 항상 말했다. 장자가 그중 한 사람이고 반은 류원덴 자신이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학문의 깊이만큼 문장도 세련되고 품위가 있었다. 붓글씨도 명필이었다. 그러나 성격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1928년 봄 안후이대학 교장에 취임하며 남들이 흉내내기 힘든 행동을 했다. 같은 가을 교내에 좌익이 주동한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때마침 안칭에 시찰차 와 있던 장제스가 류원덴을 만났다. 서로 초면이었다. 평소 류의 책을 즐겨 보던 장제스가 물었다. “네가 정말 류원덴이냐?“ 류원덴도 지지 않았다. ”네가 정말 장제스냐?“ 장제스가 소요를 일으킨 학생들은 공산당원들이라며 처벌을 요구하자 류원덴이 대답했다.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있을 뿐이다. 누가 공산당원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총사령관이라면 부하들이나 잘 통솔해라.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은 총장인 내가 칙임지고 처리한다.“ 완전 훈계조였다.

대노한 장제스가 질책하자 류가 발끈했다. 장제스의 코를 손가락질하며 ”어디서 일개 군벌 따위가….“라는 말을 내뱉는 동시에 한 손을 들어 따귀를 후려칠 태세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제스의 경호원들이 황급하게 류원덴을 끌고 나갔다. 장제스는 식식거리며 계단 위까지 달려와 발버둥치며 끌려 내려가는 류원덴의 등을 향해 ”쩐펑즈!“ 정말 미친놈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차이위안페이 전 베이징대 총장이 소식을 듣고 장제스에게 달려가 사정한 덕택에 총장 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겨우 수습됐다. 류원덴은 보름달을 좋아해서 달밤에 야외에서 수업하기를 즐겼다. 빙 둘러앉은 학생들 가운데 서서 달빛에 젖은 채 달에 관한 옛사람들의 시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풍류를 발견하곤 했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동정 사이의 간극  (0) 2023.01.19
대문호의 대작  (0) 2023.01.18
그래 자네는 어떤가  (1) 2023.01.15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3) 2023.01.13
인생의 의미  (0) 2023.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