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사랑과 동정 사이의 간극

이춘아 2023. 1. 19. 22:50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2](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7(2009 초판).


(9~ 13쪽)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코즈느이쉐프는 지친 머리를 식힐 양으로, 외국으로 가는 대신 오월 말에 시골의 동생한테로 찾아갔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최상의 생활은 전원생활에 있었으며, 그는 이제 그 생활을 향유하기 위해 동생을 찾아온 것이다. 콘스탄틴 레빈은 이번 여름에는 니콜라이 형이 오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한층 더 기뻐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 레빈은 시골에서는 어쩐지 형과 지내는 것이 거북스러웠다. 그는 시골에 대한 형의 태도를 보는것이 어쩐지 어색하고 불쾌하기까지 했다. 콘스탄틴 레빈에게 시골은 생활의 무대, 즉 기쁨과 슬픔과 노고의 무대였다. 그러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시골은 한편으론 노고 뒤의 휴식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그 효과를 믿고 기꺼이 복용하고 있는, 쇠약해진 몸에 효험이 있는 해독제였다. 콘스탄틴 레빈에게 시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유익한 노동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좋았다. 그러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시골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특히 좋은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농민에 대한 태도도 어쩐지 콘스탄틴의 눈에 거슬렸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농민을 사랑하고 또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담았고, 자주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행동을 그는 가식을 떨거나 자만하지 않고 교묘하게 해치웠다. 그리고 그러한 담화 하나하나에서 농민에게 유리하고 우호적인 자료와, 자기의 농민에 대한 기존 지식을 뒷받침할 증거를 추출해냈다. 농민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콘스탄틴 레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콘스탄틴 레빈에게 농민은 그저 일상적인 노동에서의 중요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농부에 대해서 온갖 존경과 나아가 자신이 직접 말한 것처럼 어쩌면 농부였던 유모의 젖과 함께 그에게 흡수되었을지도 모를 일종의 혈족적인 애정을 품고 있었고, 일상적인 노동을 위한 동아리로서는 이따금 그들의 역량과 온후와 고결에 대해서 굉장한 환희를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노동 외의 것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그들의 부정이며 방종이며 폭음이며 허언 때문에 그들을 미워한 적도 빈번히 있었다. 콘스탄틴 레빈은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농민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농민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물론, 선량한 그는 사람들에 대해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편이 많았다. 농민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농민을 뭔가 특수한 대상으로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농민과 생활을 같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이해가 농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농민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자신에게서 그들과 완전히 다른 특수한 성질이나 결함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자기를 농민과 대립시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주인으로서, 중재인으로서, 특히 조언자로서(농부들은 그를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사십 베르스타 밖에서까지 그에게 의견을 구하러 왔다) 오랫동안 농부들과 가장 가까운 생활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농민에 대해서는 딱히 고정된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농민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농민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대답하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농민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에게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평소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그가 선량하고 흥미 있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던 농부들도 포함하여 모두를 관찰하고 이해하려 애쓰면서 그들에게서 부단히 새로운 특징을 찾고, 그에 따라 그들에 대한 이전의 견해를 변경하고 새로운 견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반대였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생활과 대조해서 전원생활을 사랑하고 칭송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계급과 대조해서 사랑하고, 또 그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반된 존재로서 농민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체계적인 사고 속에서는 농민생활에 대한 일정한 견해가 명백히 형성되어 있었다. 그 견해의 일부분은 농민생활 그 자체에서 추출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추출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농민에 대한 자기의 견해와 그들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를 변경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형제 사이에 농민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일어날 경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언제나 동생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농민의 성격, 특징, 취미 등에 관해 고정된 견해가 있는데 반해서, 콘스탄틴 레빈에게는 일정불변한 견해라고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논쟁에서 콘스탄틴은 언제나 자기당착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그의 막내동생은 호남이고 바탕이 고운 마음씨를 지녔으나, 이성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민활하기는 하지만 순간적인 인상에 붙들리기 쉬운 모순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형으로서의 친절한 마음으로 이따금 그는 동생에게 사물의 진의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동생이 너무나 쉽게 설복되곤 했으므로 그와 토론할 맛은 나지 않았다.

콘스탄틴 레빈은 형을 해박한 지식과 교육을 겸비한, 고결이라는 말의 가장 높은 의미에 들어맞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한 활동력이 부여된 훌륭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가 그러나 그가 나이를 먹고 보다 가깝게 형을 알게 될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고 느껴왔던 이 만인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활동력이라는 것이 실은 특출한 면모가 아니라 거꾸로 어떤 결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량이나 정직이나 고상한 욕구와 취미의 결함은 아니지만 생명력의 결함, ‘정’이라고 불리는 것의 결함, 인간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맞닥드리는 인생 행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 거기에 전념하게 하는 충동의 결함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더욱더 자주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그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를 비롯해서 사회적 복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이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 하나로 얽매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층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고찰에서 더욱 레빈의 깨달음을 확고하게 한 것은 그의 형이 민중의 행복이니 영혼의 불멸이니 하는 문제를 사고하는 태도가 장기의 승부라든가 새로운 기계의 치밀한 구조를 연구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 있었다.

콘스탄틴 레빈에게는 시골에서 형과 같이 지내는 것이 거북살스러운 이유가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시골에서는, 특히 여름철이면 레빈은 눈코 뜰 새 없이 농사에 쫓기고 있었으므로 해야 할 일을 하는 데만도 여름의 긴긴 해가 모자랄 정도였다. 그런데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유유자적하고 있는, 말하자면 저술을 하고 있지 않은 때에도 지적인 활동이 몸에 밴 사람들 누구나 그렇듯이 머리에 떠오른 사상을 압축된 아름다운 문장에 담아 표현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경우에 대부분 자연스럽게 청취자는 동생이 되는 것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양지바른 풀밭에 누워 있는 것을, 그렇게 누워 햇볕을 쬐면서 한가하게 지걸이는 것을 즐겼다.

“넌 믿을 수 없을 거야.” 그는 동생에게 말하곤 했다. “나에게는 이 시골의 게으름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를. 내 머릿속은 생각이라곤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