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중공의 한국전쟁 출병

이춘아 2023. 1. 26. 11:41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2], 한길사, 2012.

(105~127 쪽)

1950년 10월1일, 중국은 신중국 선포1주년을 맞았다. 이날 마오쩌둥은 경축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받았다. “한국전 출병”을 건의하는 스탈린과 “38선이 위험하다. 우리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다. 조선땅에 들어와 작전을 펴달라”는 북한 수상 김일성의 전보였다.

그날 밤 마오는 중공 동북국 서기 가오강을 베이징으로 호출했다. “한국군 제3사단이 북진을 시작했다”는 총참모장 녜룽전의 보고를 접한 직후였다. 이튿날 오전, 마오는 중공 중앙 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출병 문제를 자유토론에 부쳤다. 신중론이 우세하자 10월 4일부터 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자며 회의를 끝냈다. 회의장을 나서는 총리 저우언라이를 불러 펑더화이에게 비행기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펑은 시안에 있었다. 10월 4일 오후3시, 회의 참석자들은 발언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내심 출병을 반대했다. 펑더화이는 기상관계로 회의 시작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조선 출병에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토의하는 자리다.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자.“

런바오가 ‘출병 불가론’을 폈다.
”우리는 20년간 전쟁만 해왔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해방전쟁도 끝나지 않았고 해방구의 토지개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원기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과는 힘을 겨뤄본 적이 없다. 일단 출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전쟁은 끝이 보여야 한다. 참전보다는 동북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편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다음 날 속개된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한반도 출병을 주장했다.
”어차피 미국과는 한판 겨룰 수밖에 없다. 저들이 압록강변에 포진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온갖 구실을 내세워 국경을 교란시킬 것이 뻔하다. 늦게 싸우는 것은 일찍 싸우는 것만 못하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건설하자.“ 소식을 기다리던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의 소련 방문을 요청했다. 저우는 회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저우언라이가 소련으로 출발한 이틀 후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했다.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 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맞서자. 우리가 모른 체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길로 미국이 들어온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주먹 한 방 날려서 백 개가 날아오는 것을 면하자.“ 마오쩌둥의 한국전 참전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련과 북한의 등쌀에 더밀린 흔적이 역력하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계획을 떨어놓고 지지를 희망했다. 스탈린은 거절하는 대신 이렇게 충고했다.
”남한 군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반격을 핑계 삼아 38선을 넘어버려라. 단, 중국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같은 해 5월초, 마오쩌둥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 김일을 비밀리에 베이핑(10월1일 신중국 선포 후에 베이징으로 개명)으로 파견했다. 김일을 만난 마오는 김일성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남한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북한은 상대가 안 됐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 뻔했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타이완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보겠다는 의미였다. 며칠 후 두 사람은 서쪽 교외에 있는 샹산의 ‘솽칭볘수’에서 다시 만났다. 북한 인민군 정치부 주임을 겸하고 있던 김일은 ”인민군 간부를 배양해야 한다“며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 국적의 병사들을 귀국시켜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토를 달지 않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 공내전을 거치며 단련된 전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국땅을 밟았다. 몇 개월 후 동족상잔의 비극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과연 알기나 했을지 궁금하다. 한국전쟁 초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들의 귀국은 남침 2개월 전인 이듬해 4월 중순, 마지막 병력이 원산항에 도착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3개 사단을 꾸릴수 있는 규모였다. 중국과 소련은 9월 말에도 무력통일을 지지해달라는 북한의 요청을 받았다. 양측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거절했다.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중 소 동맹호조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과의 신조약이 체결되면 소련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누리던 권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시선이 한반도를 향했다.

1월 19일, 스탈린은 ”김일성이 무력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겠다며 스탈린 동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의 전보를 받았다. 11일 후,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한반도에 대한 전략을 공격으로 전환하겠다며 당부를 반복했다. ”직접 만나보니 마오쩌둥은 동북아 문제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의견을 구해라. 중공의 동의가 없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만일 미국이 간여한다면 소련은 조선을 도울 수 없다. 중국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마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라.“ 3월 중순, 김일성은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 이주연을 통해 마오쩌둥 면담을 요청했다. 마오도 집히는 게 있었던지 이주연에게 구두로 전달했다.
”통일에 관해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극비리에 와라.“
마오쩌둥은 대국의 최고 지도자 답게 의심이 많았다. 소련어 통역을 일주일간 톈진으로 놀러 보낸 후 김일성을 만났다.

1950년 5월 13일 밤,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소련이 남침에 동의했다. 직접 중국 측에 전달하라고 해서 왔다“면서 유창한 중국어로 지지를 요청했다. 마오는 즉답을 피했다. 음식 이야기로 시간을 끌며 김일성이 눈치채지 않게 저우언라이를 소련 대사관으로 파견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튿날 소련 측에서 답변이 왔다. ”조선 동지들과의 회담에서 빌리프(스탈린)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조선인들의 계획에 동의했다“면서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고도 남을 내용을 첨가했다.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토론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아라. 상세한 내용은 조선 동지들을 통해 듣도록 해라.“ 마오는 그동안 자신을 따돌린 스탈린의 처사가 괘씸하고 불쾌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5월15일, 김일성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속전속결로 끝내라. 생산시설만 집중적으로 파괴하면 된다. 대도시를 점령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미국이 참전하면 우리도 군대를 보내 돕겠다“며 김일성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마오 몰래 소련으로부터 전쟁물자를 공급받은 김일성은 ”동의한 것만으로 족하다“며 자리를 떴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 날 마오는 스탈린이 보낸 전보를 받았다. 의견을 구한다며 단둥에서 선양까지 인민해방군 몇 개 사단을 배치해주기를 희망했다. 마오는 그날로 답전을 보냈다.
”해방군의 동북 투입은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그간 전쟁을 치르느라 소모가 컸다. 소련 측에서 방비와 무기만 제공한다면 병력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스탈린도 ”장비는 우리가 해결하겠다. 단, 하루라도 빨리 부대를 동북의 동남지구에 배치하기 바란다“고 화답했다. 6월 25일, 마오는 오후가 되어서야 프랑스 통신사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의 정식 통보는 사흘 후, 그것도 베이징 주재 북한 무관을 통해서였다. 같은 날, 스탈린이 보낸 전보도 받았다.
”김일성은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심과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자 마오쩌둥도 서서히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한반도 출병을 준비하던 마오쩌둥은 지휘관 선정을 서둘렀다. 저우언라이는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류보청을 추천했다. 마오는 생각이 달랐다. 난징에 군의 최고학부를 설립하고 류보청에게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당시 해방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는 거칠고 교양 없는 자들이 많았다. 마오는 ”큰 재목은 큰일에 써야 한다“며 덩샤오핑도 제외시켰다. 천이는 타이완 해방을 준비하느라 주둔지인 화동 지역을 떠날 수 없었고, 뤄룽환은 겉모습만 멀쩡했지 잔병이 많았다. 가오강은 동북의 왕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후방에 버티고 있어야 군수물자의 원활한 공급이 가능했다. 마오는 국방위원회 주석 자격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총사령관 주더가 ”홍군 시절 부총사령관이었고, 지금도 전군의 부총사령관“이라며 펑더화이를 추천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오가 박수를 치며 다른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한국전에 파병할 지원군의 명칭을 놓고 숙고했다. 뭐든지 트집 잡기 좋아하는 민주인사들에게 조어을 구했다. 뒷말을 없애기 위해서였지만 부총리 황옌페이가 그럴싸한 의견을 내놨다.
”지원군은 파견군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국가와 국가 간의 대립으로 몰고 갈 필요가 없다. 우리 인민들이 조선 인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한 걸로 하자.“
황옌페이는 미국 독립전쟁 시절 프랑스가 지원군 명의로 정부군을 미국에 파견해 영국군과 싸운 사실을 상기시켰다. 마오는 귀가 솔깃했다. 1050년 10월 7일 밤, 마오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를 ”늦은 저녁이나 하자“며 집으로 초대했다. 전선으로 나가는 지휘관을 위한 일종의 송별연이었다. 이날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을 지원병으로 추천했다. 펑더화이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며 웃었다.

잠자코 앉아 있던 마오안잉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급하게 지원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레닌 군정대학을 마쳤다. 기갑부대 중위로 독 소전에도 참전했다. 지원병 1호로 나가겠다.” 아들이 펑더화이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마오는 펑더화이와 눈이 마주치자 ”이 애는 우리가 못하는 러시아 말과 영어도 다 할 줄 안다. 조선에 나가면 소련사람, 미국사람들과 부딪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할 거냐“라며 싱글벙글했다. 펑더화이는 항일전쟁 시절 나이 40이 넘어서야 결혼 비슷한 걸 했지만 아직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펑더화이도 결심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요원으로 절대 안 된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을 자신의 집무실 부근에서 비서 겸 통역으로 활동하게 했다. 보초 근무를 못하게 하고 총도 지급하지 않았다. 항상 눈앞에 보여야 마음이 놓였다. 부사령관 덩화와 홍쉐즈, 펑더화이 집무실 근무자 외에는 아무도 마오안잉의 신분을 몰랐다. 1950년 11월 7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제1차 작전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청천강 이남까지 후퇴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국전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며 총공격을 준비했다. 11월 24일 오후, 미군 비행기 두 대가 대유동 상공을 한 시간 남짓 휘젓고 돌아갔다. 동체에 ‘BLACK WIDOW’(미국산 독거미)라고 씌어 있는 정찰기였다. 징조가 심상치 않았다. 그날 밤, 한반도 북단의 폐광에서 중공군 당 위원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부사령관 홍쉐즈가 펑더화이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의결했다. 이튿날 새벽, 홍쉐즈는 펑더화이에게 산중턱에 있는 동굴로 집무실을 이전하자고 건의했다. 마오안잉이 폭사하기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약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펑더화이가 양펑안에게 상황실에 가서 전선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B-26 전폭기 두 대가 지휘부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상황실에는 참모 네 명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입구에, 아침밥을 거른 마오안잉과 서북 출신의 참모 한 사람은 안쪽에 있는 난로를 쬐며 볶음밥을 데우고 있었다. 보고할 문건을 챙겨 든 양펑안이 문을 여는 순간 방금 전에 보았던 전폭기가 회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펑안은 빨리 피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수십 발의 폭탄이 비 오듯 했다. 하늘과 땅이 불바다로 변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서운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펑더화이의 집무실도 불구덩이 휩싸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네이팜탄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황실 입구에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안쪽에 있던 마오안잉과 참모 한 사람은 화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지 34일 만이었다. 보고를 받은 펑더화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직접 확인하겠다며 동굴을 뛰쳐나걌다. 현장은 참혹했다. 시신이 식별과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러시아제 시계와 이이들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긴 호신용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되자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4년 전 소련을 떠날 때 스탈린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자랑하던 마오안잉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참으로 기구한 삶이었다.

마오안잉은 1922년 10월24일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우한으로 떠난 아버지 마오쩌둥은 폭동을 주도하고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체포되는 바람에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감옥 생활을 했다. 생모가 총살당하자 보석으로 풀려난 마오안잉은 동생들을 데리고 거리를 방황했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떠나기까지 5년간 상하이 거리를 헤매며 구걸과 호떡집 종업원, 인력거군 등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사이 막내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일설에는 실종), 바로밑의 동생은 경찰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불치의 병을 얻었다. 마오안잉이 소련서 귀국하는 날 마오쩌둥은 병중이었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장에 나가 아들을 맞이했다. 19년 만의 부자 상봉이었다. 이틀간 같은 방에서 열 끼를 먹으며즐거워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도 회복했다.

저우언라이와 리커눙으로부터 장남의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햇다. 후일 경호원 중 한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주석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그 처연한 옆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