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아니 어째서 저 사람들은

이춘아 2023. 2. 10. 23:57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3](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7(2009 초판).

레프 톨스토이(1828 ~ 1910): 남러시아 툴라 지방의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톨스토이 백작가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밑에서 성장했다. 1862년 결혼 후,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집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뒷부분을 집필하던 1870년대 후반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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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 같은 사람은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성이 주어져 있는 것이라면 벗어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고 느낄 때, 또 이러한 것은 모두 보기도 싫다고 느낄 때, 어째서 촛불을 꺼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러나 어떻게 꺼야 할까? 아니, 어째서 저 차장은 발판을 따라서 뛰어가는 것일까? 어째서 저 사람들은, 차내의 저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저 사람들은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웃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다 진실이 아니다. 모두 거짓이다. 모두 기만이다. 모두 사악이다!…‘

열차가 역에 다가갔을 때 안나는 다른 승객들의 무리를 빠져나가 문둥이를 피하기라도 하듯이 그들로부터 떨어져서는 플랫폼에 발을 멈추고 자기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를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다. 얼마 전까지는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계획들이 지금은 아주 어렵게 여겨졌다. 게다가 그녀에게 평안을 주지 않는 이 추악한 사람들의 떠들썩한 무리 속에서는 더욱 어렵게 여겨졌다. 화물 운반인들이 짐을 나르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그녀 옆으로 달려오는가 하면, 젊은 남녀가 플랫폼의 널빤지를 구두 뒤축으로 쿵쿵거리기도 하고, 또 마주치는 사람들이 온갖 방향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그녀는 만약 회답이 없으면 더 멀리 갈 작정이었던 것을 생각해냈기 때문에, 화물 운반인 하나를 불러세워 브론스키 백작한테 편지를 가지고 갔던 마부가 여기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브론스키 백작 말씀인가요? 방금 그 댁에서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로키나 공작부인과 따님을 마중하러요. 그런데 그 마부라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녀가 화물 운반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부인 미하일이 빨갛고 유쾌한 얼굴로 말쑥한 푸른색 등거리 외투를 입고 그 위로 시계줄을 번득거리면서, 분명 자기의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뽐내는 듯한 태도로 그녀에게 다가와서 편지를 건냈다. 그녀는 봉인을 뜯었다. 그녀의 심장은 읽기도 전에 오그라들었다.

‘당신의 편지가 여기로 떠나오기 전에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나는 열시에 돌아가리다‘하고 브론스키는 아무렇게나 내갈기고 있었다.
’그래. 내가 생각했던 대로다!‘ 그녀는 심술궂은 미소를 때면서 속으로 말했다,.
“좋아, 그럼 너는 집으로 돌아가.” 그녀는 미하일을 돌아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녀가 조용히 말한 것은 심장이 하도 빨리 뛰어 숨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녜요. 나는 이제 더이상 자신을 괴롭히는 것 따위는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닌, 그녀를 괴롭히는 누군가를 으르대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기차역의 건물 옆을 지나서 플랫폼을 따라 걸어갔다.

플랫폼을 걷고 있던, 하녀인 듯한 두 여자가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를 쳐다보면서 그녀의 옷차림에 대해 큰 소리로 비평을 했다. “진짜야.” 두 여자는 그녀의 옷에 달린 레이스에 대해서 말했다. 젊은 사내들은 그녀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웃음을 섞어 뭐라고 외치면서 또다시 그녀 옆을지나갔다. 역장은 지나가다가 그녀에게 기차에 탈 것인지를 물었다. 크바스를 파는 소년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경을 쓴 신사를 맞아 큰 소리로 웃고 이야기하던 몇몇 부인과 아이들은 그녀가 그들 가까이 오자 갑자기 소리를 죽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걸음을 빨리하여 그들에게서 떨어져서 플랫폼 가장자리로 갔다. 화물열차가 들어왔다.플랫폼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또다시 기차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처음 브론스키와 만났던 날의 역사자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빠르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급수탑에서 레일 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간 안나는 지나가는 열차에 바짝 가까이 가서 멈추었다. 그녀는 기차와 차량 밑을 보았다. 나사와 쇠사슬이 서서히 움직여가는 맨 첫번째 차량의 높다란 주철제 바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기의 눈대중으로 앞바퀴와 뒷바퀴의 한가운데를 정하고 그 부분이 자기의 정면에 오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다.

’저기다!‘ 그녀는 침목 위에 흩뿌려져 있는 석탄이 섞인 모래와 그 위로 드리워진 차량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저기로 저 한가운데로 그리고 나는 그이를 벌하고 모든 사람들과 나 자신으로 부터 벗어나자.‘

그녀는 첫번째 차량의 한가운데가 자기의 정면에 왔을 때, 그 밑에다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손에서 놓으려고 했던 빨간 손주머니가 그녀를 붙잡았으므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가운데는 이미 지나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차량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해수욕을 하면서 마악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에 여러 차례 경험했던 것과 흡사한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긋는 이 익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에 처녀 시절과 어렸을 때의 일련의 추억을 온전하게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를 위해서 삼라만상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걷히고 한순간, 생이 그 모든 빛나는 과거의 환희와 더불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한가운데가 그녀 앞까지 온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빨간 손주머니를 내던지고 두 손을 짚고 차대 밑으로 넘어지면서, 그리고 곧 일어나려고 하는 듯한 가벼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공포를 느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하고 무자비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꽝 하고 떠받고 그 등을 할퀴어 질질 끌어갔다.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을 용해주소서!‘ 그녀는 이미 저항하기엔 늦었음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한 농부가 뭐라고 웅얼거리면서 쇠붙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불안과 기만과 비애와 사악으로 가득 찬 책을 그녀에게 읽게 해주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확 타올라 지금까지 어둠에 싸여 있던 일체의 것을 그녀에게 비추어 보이고는 파지직, 소리를 내고 어두워지다가 이윽고 영원히 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