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나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이춘아 2023. 2. 17. 23:06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김지우 옮김), 한길사, 2017.

(504~ 508쪽)

한번은 노르말레 대학 시절 프랑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마리아로사에게 그와의 관계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들려주었다.

“나는 프랑코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그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거든. 그래서 프랑코가 지금 나와 아이들을 냉정하게 대하는 게 더 마음이 아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어요.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이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지금 한 이야기를 글로 한번 써봐.“ 마리아로사가 나를 격려했다. 마리아로사는 조금 감정이 복받친 것 같았다. ”나는 프랑코의 그런 면을 알지 못했어.“ 마리아로사가 말했다.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몰라. 과거의 프랑코였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과하게 똑똑해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남자들은 딱 질색이거든. 나는 내가 집에 데리고 와서 돌보고 있는 지금의 병들고 내성적인 남자가 좋아.“

마리아로사는 다시 한 번 내게 당부했다.

”아무튼 지금 한 말은 꼭 글로 쓰도록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리아로사의 칭찬에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다소 황망히 피에트로와의 관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였다. 나는 그가 자꾸만 내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려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변했다. “프랑코와 피에트로를 비교하는 거야? 지금 농담해?” 마리아로사가 말했다. “남성성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아이인데 자신의 여성적인 감성을 네게 강요할 만한 힘이 어디 있어?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네가 페에트로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줄 알았어. 결혼한다 해도 일 년이 못 되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도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기적 같아. 불쌍한 레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렇다. 내 남편의 친누나가 우리의 결혼이 애당초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대놓고 내게 말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아로사의 말은 불편한 내 결혼 생활에 대한 객관적이고 최종적인 판결문 같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데데는 이미 읽고 쓰기가 능숙한 상태에서 남들보다 조금 먼저 초등학교 입학했다. 엘사는 아침 내내 조용한 집에서 나를 독차지하게 되자 너무 기뻐했다. 남편은 대학가에서 가장 고리타분한 교수인데도 드디어 두 번째 저서의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번 책은 첫 번째 책보다 학술적으로 더 중요한 저서가될 것 같았다. 나는 이이로타 부인이었다. 엘레나 아이로타. 나는 그동안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생활 때문에 비탄에 잠겨 있었지만 이제는 시누이에게 고무되어, 그리고 나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성상을 주제로 고대사와 현대사를 넘나드는 연구를 남몰래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리아로사와 시어머니나, 지인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이론을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 시작해 대니얼 디포의 플랜더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톨스토이의 카레니나, 프랑스 유행잡지 [최신 유행], 마르셀 뒤샹의 로즈세라비뿐 아니라 그 이후의 시대까지 밀어붙여서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나는 서서히 만족감을 느꼈다. 어디에서든 남성에 의해 주조된 꼭두각시 같은 여성상의 흔적이 보였다.

진정 여성적인 것은 없었다. 조금이나마 뭔가 나타날 만하면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남성들이 여성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였다.

피에트로는 직장에 가고 데데는 학교에 가고 엘사는 내 책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놀고 있을 때면 그제야 나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함축된 의미를 파헤치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가끔은 릴라와 내가 함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까지 졸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찰떡궁합을 자랑하면서 학교에 다녔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정말 완벽한 짝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서로의 지성을 함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각자 이해한 내용과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기뻐했을 텐데. 함께 글도 쓰고 공동저자로 이름을 알리고 서로의 존재에 힘을 얻고 그 누구도 감히 우리 둘만의 것을 흉내 내지 못하도록 함께 싸웠을 것이다.

여성의 고독은 슬픈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름의 문화나 전통을 만들어낼 기회도 없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에서 상대방을 쫓아내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생각이 중간에서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매력적이지만 결함이 많아서 당장 확인이 필요하고 더 발전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생각에 자신감도 믿음도 없었다. 그럴 때면 다시 릴라에게 전화해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내 생각 좀 들어봐. 같이 이야기하자. 네 의견을 말해줘. 지난번 네가 해줬던 알폰소 이야기를 기억해?‘ 하지만 이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십수 년 전부터 이미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어느 날이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피에트로가 데데를 데리고 점심식사를 하러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책과 공책을덮었다. 데데는 벌써 거실로 뛰어들었고 엘사는 그런 언니를 반갑게 맞았다. 데데는 배가 많이 고플 것이다. ’엄마, 오늘 점심은 뭐예요?‘ 나는 데데가 이렇게 말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가방을 미처 내려놓기도 전에 데데가 외쳤다. “아빠 친구가 왔어요. 우리랑 함께 점심을 먹는대요.” 나는 아직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1976년 3월9일이었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데가 내 손을 잡고 복도 쪽으로 이끌었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왔다는 언니의 말에 엘사는 벌써 조심스럽게 내 치마에 꼭 달라붙었다. 페에트로가 명랑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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