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한길사, 2018(2017 초판).
(233 ~ 246쪽)
1980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지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파멸과 함께 우리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지진은 일상의 견고함과 안정감을 앗아갔고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될거라는 확신을 없애버렸다. 익숙한 소리와 행동,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졌다. 모든 확신에 의심이 스며들었다. 모든 불운을 예고하는 예언이 신빙성을 얻고 사람들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징조에 불안한 관심을 쏟게 되었다. 통제력을 되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순간이 뒤를 이었다.
바깥 상황은 집 안보다 더 좋지 않았다. 모든 것이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 때문에 두려움이 더 커졌다. 철도 쪽으로 붉은 섬광이 보였다. 베수비오화산이 다시 깨어난 것이다. 파도가 메르젤리나와 시청, 키아타모네를 덮쳐왔고 폰티 로시는 무너져 내렸다. 피안토 공동묘지는 시신들과 함께 가라앉았고, 포지오레알레 지역 전체가 파괴됐다. 죄수들은 폐허 밑에 깔리거나 감옥에서 도망쳐 나와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다. 마리나 쪽으로 연결되는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도망치던 동네 사람들 반이 땅속에 묻혔다. 상상력은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했고 릴라는 내 팔을 꼭 붙잡고 덜덜 떨면서 들려오는 말을 다 믿었다.
“도시는 위험해.”
릴라가 속삭였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건물들이 부서져서 우리 위로 무너져 내리고 있어. 시궁창 물이 사방에 튀고 있고. 저기 쥐새끼들 도망가는 것 좀 봐.”
“모두들 들판으로 가는 거야.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
릴라도 자기 자동차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는 그날따라 유난히도 가벼워 보이는 하늘밖에 없는 열린 공간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도무지 릴라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 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릴라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과장된 표현을 마구 내쏟았다. 릴라 입에서는 사투리가 뒤범벅된 문장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어린 시절 다독가다운 표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릴라는 자기는 절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거칠고 고통스럽게 뒤틀린 사물의 본모습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했다. 릴라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잘 정돈됐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런 사물의 거짓된 모습을 사물의 본모습이 밀쳐내 버리면 자기는 혼란스럽고 끈적거리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정에 뚜렷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다. 촉각이 시각으로, 시각이 후각으로 녹아내린다고 했다.
“아! 세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지금 너도 봤잖아, 레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아무 것도 없어.”
“알았어. 알았으니 이제 그만 쉬어.”
나는 릴라가 말하는 내내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옆에서 꼭 껴안아주자 릴라는 결국 잠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릴라가 내게 부탁했던 것처럼 잠을 자지 않고 밤새 그런 릴라를 지켜봐주었다. 가끔 경미한 여전이 다시 느껴지기도 했다. 자동차 안에서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릴라의 배를 만져보니 릴라의 아이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면 아래에서 흐르는 희염의 바다도 용광로처럼 일렁이는 별빛도 행성도 우주도 암흑 속의 빛과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의 침묵까지도.
나는 여전히 릴라가 겁에 질려 쏟아 낸 파도 같은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두려움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용암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지구 내부에서 흐르는 상상 속의 불타는 강물마저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모든 두려움은 내 머릿속에서 정돈된 문장과 조화로운 이미지로 정리되어 나폴리의 길처럼 까만 돌로 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한마디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든 책이든 프랑코든 피에트로든 아이들이든 니노든 지진이든 그 무엇이 내게 부딪혀 올지라도 결국 다 지나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나의 수많은 자아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연필심이 원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컴퍼스의 고정된 축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릴라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 그런 자신에 확신이 생겼고 뿌듯했다. 그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고 릴라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릴라는 도무지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릴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릴라는 분노하며 분개하면서 언제나 우리 위에 군림해왔고 모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해왔다. 그런 릴라가 정작 자신을 녹아내린 액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릴라가 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형태를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조종했는데도 액체가 범람하면 릴라는 스스로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럴 때면 혼돈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나 활발하고 용맹한 릴라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무가 되고 말았다.
동네는 텅 비고 길은 정적에 휩싸이고 공기는 차가워졌다. 어두운 돌 무더기로 변한 건물에서는 전등 불빛도, 텔레비전의 알록달록한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아직 어두웠다. 릴라는 차 안에 없었다. 릴라 쪽 차문이 열려 있기에 나도 차문을 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멈춰 서 있는 자동차마다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 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잠꼬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릴라 집에 다시 들어갈 방법을 찾았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봤지만 연결되지 않거나 전화벨만 울릴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릴라의 부모님도 엔초와 젠나로 소식을 알고 있을 아멜리노에 있는 엔토의 친척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니노도 그의 친구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피에트로와는 전화가 연결됐다. 그는 방금 지진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며칠만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했다. 위험한 상황이 완전히 끝났는지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진의 피해는 커져만 갔다. 우리는 별일 아닌 일로 놀랐던 것이 아니었다. 릴라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것 봐, 땅이 두 동강 나는 것 같았다니까.”
우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데다 너무 피곤해서 넋이 나간 상태였지만 그래도 고향 동네와 도심을 돌아다녔다. 도시는 비탄에 잠겨 있었다. 간혹 귀에 거슬리는 사이렌 소리가 흐르는 적막을 뚫고 고향 동네를 가로질렀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말을 많이 했다. 니노는 어디 있을 까. 엔초는 어디 있을까. 젠나로는 어디 있을까.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마르첼로는 어머니를 모시고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릴라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
나는 릴라가 지진이 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릴라는 지진으로 인한 충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기준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릴라에게 지진에 대해 말했다.
릴라가 자기 통제력을 찾아갈수록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휩쓸고 간 파멸과 죽음의 흔적이 뚜렷해졌다. 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민망해하지 않고도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했다. 하지만 뭘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흔적이 아직도 릴라에게 남아 있었다. 릴라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졌고 목소리에서도 불안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지진에 대한 기억은 오래갔다. 나폴리는 지진의 기억을 간직했다. 안개처럼 희뿌연 숨결 같은 더위만이 굼뜨고 거친 도시의 생명과 육체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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