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권력과 욕망의 이중주

이춘아 2023. 12. 3. 10:30

옌롄커, [일광유년], 자음과모음, 2021.


(956~959쪽)
옮긴이의 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나와 아버지], [딩씨 마을의 꿈], [샤를뤄], [연월일], [레닌의 키스], [침묵과 한숨]

내가 옌롄커의 작품을 번역한 순서다. 그리고 [일광유년]이 아홉 번째 작품이다. 이 가운데 [나와 아버지]와 [침묵과 한숨]은 산문이고 나머지는 전부 소설이다. 이 순서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저작권 계약 시기와 출판사의 독촉 순서대로 번역한 것일 뿐이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번역하는 동안 줄곧 어떤 강렬한 흥분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옌롄커의 소설은 전부 강렬하고 극단적이다. 소설은 극단의 예술임이 틀림없다.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과 현상들을 비현실적 재현을 통해 강렬하지도 않고 극단적이지도 않은 현실과 연결하는 것이 소설이다. 따라서 허구이지만 그 허구의 틀 여기저기에 현실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허구를 통해 현실로 만드는 것이 소설이다. 이러한 소설 미학을 옌롄커는 신실주의(神實主義)라고명명하고 있다. 현실보다 더 진실한 현실의 재현을 위해 옌롄커의 소설을 관통하는 허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강렬과 극단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글쓰기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영혼을 담아 목숨을 걸고 써내는 이른바 ‘발분지작(發憤之作)’과 일정한 목적과 어젠다에 따라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온갖 미학과 예술적 기교를 총동원하여 써내 감각에 호소하고자 하는 ‘무병신음(無病呻吟)‘이 그것이다. 진실이 역사를 정리하듯이 문학 예술도 절대적으로 ‘발분지작’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 잘못 알려진 것처럼 체제에 저항하고 비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사유와 글쓰기의 초점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아니라 원초적인 인간의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싼 조건이다. 이 작품을 쓸 당시 그는 온몸이 다양한 질병에 점령당해 손발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의료용품 공장에 특별히 주문하여 제작한 특수침대에 누워 당시로서는 얼마나 남아 있을지 단정하기 어려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털어 이 작품을 썼다. 전형적인 ‘발분지작’이다. 죽음이 저만치 보일 때, 그의 사유를 이끌어준 것은 더더욱 원초적인 생명의 의미와 조건들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시종 촌장이라는 하찮은 권력과 성애와 생육을 바탕으로 하는 욕망의 이중주가 펼쳐진다. 화려하고 복잡한 제도와 문명이 생략된 농촌의 삶은 건강한 자연의 법칙이 지배할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철저하게 권력과 욕망에 지배되고 있다. 욕망은 원래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공자가어기(孔子家語記)]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경전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과 남녀의 성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자리하는 곳’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권력에 지배당해 왜곡된 욕망은 죽음이나 빈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악이 자리하는 곳’이 되기 십상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삶의 풍경은 이처럼 권력에 의해 왜곡된 인성과 욕망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서사의 전 과정에 죽음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서사 전체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자리나 삶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삶 속에 공존하고 있다. 생명과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음이 곧 삶이고 생명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삶과 생명에 대한 도저한 부정이나 불길한 예시가 아니라 솔직한 토로이자 인정이다. 죽음의 존재와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화해하지 않고는 우리의 삶이 철저해질 수 없다는 아주 간단한 고백이 이 소설이 제시하는 명제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