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느낌과 상상,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

이춘아 2023. 12. 8. 22:24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바다출판사, 2023.


(372~ 379쪽)

진화의 역사에서 장 신경계는 중추 신경계보다 오래되었다. 5억 년 전 자포동물인 해파리에서 최초로 나타난 신경계의 하나는 소화 작용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동물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배설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도 손발을 움직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장의 운동이다. 장의 움직임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제어된다. 따라서 장 신경계는 거의 독립적인 중추 신경계라고 볼 수도 있다. 주변 환경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음식에 대한 것이고 음식과 피부를 맞댄 채 정보를 수집하고 영양소를 흡수하는 기관이 장이다. 장에서 뇌로 오는 신호는 느낌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장이 안 좋은 사람이 좋은 감정 상태를 갖기 힘든 이유랄까. 이처럼 느낌은 뇌가 아니라 몸의 기관과 신경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따라서 대뇌피질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동물은 느낌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마지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외부와 내부 상태에서 오는 두 종류의 데이터를 이미지로 표상하여 종합한다. 내부 상태란 바로 느낌이며 주관성을 가진 ‘의식’의 기초가 된다. 주관성이란 나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정보에 근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약 5만 년 전쯤 인간의 의식에 인지 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인간은 정교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을 믿는 능력을 통해 인간 사이의 협력은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인지 혁명이나 상상을 믿는 능력 모두 항상성 유지에 도움이 되는 특성이다. 문화가 이런 특성의 필연적 귀결인지 부차적 산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항상성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는 주관성을 가진 의식에서 몇 단계 발전하여 나온 산물이다. 의식은 느낌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결국 문화는 느낌의 산물이다. 느낌의 존재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항상성 유지가 생존에 유리한 사회적 행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려면 느낌에서 출발하여 주관성을 가진 의식의 탄생, 상상의 산물을 믿는 인지 혁명, 인간 사이의 대규모 협력이라는 몇 번의 창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느낌에 대한 다마지오의 견해는 흥미롭지만 문화까지 끌고 가는 논리에서는 다소 비약이 느껴진다. 하지만 문화란 것이 느낌이라는 항상성 유지의 결과물이자 상상에 기초한 인간 협력의 산물이라는 관점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진화심리학은 문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인류의 조상은 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사이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개별 인간은 자연 앞에 나약한 존재다. 현대인이 열대 밀림에 홀로 떨어진다면 하룻밤을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거다. 하지만 인간은 고도의 협력을 통해 삶의 터전을 전 세계로 넓혀갔고 그들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했다. 고도의 협력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은 정령이나 신을 믿으며 단결할 수 있었고 집단내 갈등을 신의 명령이란 이름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특히 언어는 협력을 위한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였을 뿐 아니라 복잡한 상상과 추상적 개념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상상의 산물을 만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상상을 믿는 능력만으로 인간의 문화가 가진 특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문화는 자연선택에 유리한 심리적 적응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문화적 행동을 하게 만든 심리 상태가 결국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철저히 진화론적인 관점이다. 동물이라면 문화의 주된 자극이 자연 환경이겠지만 사회성이 중요한 인간의 경우 사회적 환경도 무척 중요하다. 물론 사회를 이루어 사는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동물들에게도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태적 혹은 사회적 환경에서 기인한 문화를 진화심리학에서는 ‘유발된 문화’라고 한다. 한편 인간은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개인들 간에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가능한다. 사람들 사이에 상호 정보 교환을 통해 만들어지 문화를 ‘전달된 문화’라고 한다. 유행하는 음악이나 패션 등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여 생겨가는 전달된 문화의 예다. 도킨스라면 이것을 밈이라 부를 것이다.

약 5만 년 전쯤 일어난 인지 혁명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사건으로 인간은 상상을 믿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날아오는 물체를 피하는 물리적 지각은 웬만한 동물도 본능적으로 할 수 있다. 세상이 편평하다든가 태양이 우리 주위를 돈다는 것은 인지 혁명이 없어도 인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 인지 혁명의 결과일 것이다. 더 나아가 태양신이 우리를 사랑하여 올해 홍수가 나지 않았다고 상상하고 태양신을 위해 감사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거다. 상상은 환경과 상호 작용하며 점점 더 정교해졌다. 농경으로 잉여생산물이 축적되자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은 무력과 정치력으로 지배 계급이 되었다. 인간 지배 계급은 좀 더 정교한 방법을 찾아냈다. 자신의 권력은 태양신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는 상상을 다른 사람들이 믿게 만든 것이다. 인지 혁명은 이런 믿음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태양과 별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은 선사 시대부터 중요한 지식이었다. 지배자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상상이 불가항력적일 뿐 아니라 검증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신석기 혁명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일어났다. 도구는 점차 발전하고 다양해져서 결국 망원경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던 갈릴레오는 우리의 감각과 경험에 근거한 지식을 뛰어넘는다.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 우리가 아니라 태양이 세상의 중심이다. 이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태양이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가 그 주위를 도는 행성이라면, 왜 사과는 세상의 중심인 태양이 아니라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가? 뉴턴은 중력 이론과 함께 모든 별들의 운동을 설명하는 운동 법칙을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굴레를 벗어나 실재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인간만의 문화를 만들었고, 문화를 통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포유동물이 되었다. 인간다움은 문화에 있지만 문화의 이름으로 강요된 악습과 억압은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제 문화의 산물인 과학이라는 방법론은 인간이 상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도록 이끌고 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을 차가운 복제기계로 보게 만들었지만, 문화를 설명하려는 밈에서 인간에 대한 도킨스의 애정이 엿보인다. 문화가 느낌에서 왔다는 다마지오의 주장은 문화의 지평을 단세포 생물로까지 넓혀준다. 문화가 무엇이며, 왜 생겨났는지 무엇이 특별한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쉴 새 없이 문화를 전달하고 복제한다. 문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는 날,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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