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생명 여정의 신비한 빛

이춘아 2023. 11. 24. 12:03

옌롄커, [연월일](김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9.


작가가 과거의 글쓰기를 회상하는 것보다 더 감격스럽고 우울한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항상 이처럼 힘들고 고통스럽게 당시의 글쓰기와 슬픔을 회고하곤 합니다. 29년 전에 저는 극심한 허리 통증과 목디스크를 앓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대한 중국 대륙 각지를 돌며 영험한 의술과 명약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요. 또 한편으로는 목숨이 붙어 있다는 이유로 하는 수 없이 매일 침대에 올라가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습니다. 이렇게 4,5년을 보낸 뒤 어느 날 저는 우연히 중국 시안에서 멀리 떨어진 옥수수를 가득 심은 황량한 들판에 서 있었습니다. 치료를 받고 병세가 조금은 호전되었으므로 그 텅 비고 드넓은 조용함 속에 편안한 마음이었지요. 평안한 정적 소리가 제 발밑을 잔뜩 휘감았습니다. 순간 저는 걸음을 옮기다가 ‘쾅’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 한 사람과 옥수수 줄기 하나만을 묘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자, 온몸이 떨리면서 그 자리에서 붙박인 듯 꼼짝도 하지 못했지요.  저는 문학에서 말하는 영감과 시인 T.S.엘리엇이 줄곧 말해왔던 ‘신비한 시각’, 그리고 ‘신비한 은혜’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적막하고 신비한 은혜가 발산하는 영험한 빛 속에서 미세한 번개처럼 머릿속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비함은 떠나고 그 그림자만 남았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황급히 적막한 광야를 벗어나 사람 냄새로 가득한 세상과 저의 거처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황급히 고마운 의사 선생님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저는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저는 중국의 장애인 용품 공장에서 특별히 설계, 제작한 의자에 옆으로 누워 허공을 향해 팔을 든 자세로 글을 쓸 수 있는 철판 위에서 이 소설 [연월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8월29일 홍콩에서 
      옌롄커


[연월일]  (142~ 147쪽 발췌) 셴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죽으면 축생인 너로 변해서 환생할 것이고, 너는 죽으면 사람인 나로 변해 내 어렸을 때 모습으로 환생할 거야.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게다.“

정말로 눈먼 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개는 일어나보려고 노력했지만 앞발에 너무 힘이 없어 또다시 무덤 옆의 흙더미 위로 엎드리고 말았다. 셴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서 가서 솥 안에 남은 기름이 뜬 국을 마시거라.“
눈먼 개는 셴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셴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럼 이제 동전을 던질게. 누구라도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상대방을 무덤 안으로 밀어넣고 묻어주는 거야.”
눈먼 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셴 할아버지가 평평하게 갈아놓은 땅을 바라보았다.  셴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개의 등을 세 번 쓸어주고 나서 흙더미 위에서 일어섰다. 해가 빠른 걸음으로 산등성이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이 뜨겁고 광활한 대지 위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대한 천이 산등성이 저편에서 바람에 휘날려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욕을 해댔다.  “이 조상 대대로 염병할 해 같으니라고!”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동전을 힐끗 보고는 눈먼 개를 향해 고개를 돌려 동전을 던진다고 알렸다. 동전이 허공에 던져졌다. 햇빛이 수풀처럼 조밀했다. 장대 하나 높이로 허공에 올라간 동전은 햇빛에 부딪치자 금속이 서로 부딪칠 때 나는 붉고 빛나는 소리를 내더니 떨어질 때는 빙글빙글 여러 번 몸을 뒤집으면서 빛발을 이리저리 잘라냈다. 셴 할아버지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동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갑자기 아주 커다란 빗방울을 쳐다보는 것처럼 눈동자가 경직되면서 피가 몰려 몹시 아팠다. 눈먼 개도 흙더미 위에서 일어섰다. 개는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 붉고 누르스름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 잘 익은 살구가 풀밭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셴 할아버지가 동전 쪽으로 다가갔다. 
눈먼 개도 셴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셴 할아버지는 갈아놓은 땅 앞으로 가서 허리를 약간 구부렸다가 다시 몸을 곧게 세우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님아, 가서 저 기름 뜬 국 반 사발을 마시거라. 그걸 마셔야 나를 묻을 힘이 생기지.”
눈먼 개는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셴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서 가. 말 들어라 그걸 마시고 나서 날 묻어야 한단 말이다.”
눈먼 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앞발을 구부려 셴 할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셴 할아버지가 또 말했다. 

“미안해서 그러는 거냐? 그럼 내가 동전을 두 번 더 던지마. 세 번 가운데 글자가 두 번 나오면 내가 죽고 그림이 두 번 나오면 네가 죽는 걸로 하자꾸나.”
눈먼 개가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셴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동전을 던졌다. 동전은 눈먼 개 앞에서 떨어졌다. 셴 할아버지가 동전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다시 던질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
셴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땅바닥에 앉았다. 눈먼 개는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쫓아 앞발로 동전 윗면을 만져보더니 다시 혀로 같은 자리를 핥았다. 엎드려 핥으면서 아주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개의 머리 아래에 작은 진흙 구덩이 두 개가 생겼다. 

“어서 가서 기름 뜬 국물 반 사발을 먹거라.”
셴 할아버지가 말했다. 
“마시고 와서 파놓은 흙으로 나를 묻도록 해” 말을 마친 셴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움막 기둥 아래로 가서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기를 뽑아 왔다. 길이가 두 자 조금 넘는 막대기였다. 중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입으로 한 번 불자 바람이 잘 통했다. 할아버지는 이 대나무 막대기를 항아리 아래 작은 구멍에 찔러넣은 다음 고무로 그 작은 구멍의 주위를 메웠다. 구멍 주변으로 물이 한 방울도 새나가지 못했다.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기 끝을 한 번 누르자 가느다란 물방울이 생기면서 똑똑 옥수수 알갱이처럼 반짝이는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옥수수 뿌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땅바닥에서 금세 푸르고 붉은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점점 넓게 땅바닥을 적셨다. 

셴 할아버지는 잘게 다진 흙을 쌓아 옥수수 줄기 둘레에 작은 테두리를 만들었다. 물방울이 많이 모이더라도 다른 곳으로 멀리 흘러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세심한 작업까지 마친 할아버지는 손에 묻은 흙을 털고 고개를 돌려 머리 꼭대기에 떠 있는 해를 보고는 저울을 가져다 햇빛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한 냥 5전이었다. 이어서 말채찍을 가지고 공터로 간 셴 할아버지는 해를 향해 열 번 넘게 연달아 거칠게 휘둘렀다. 무수한 햇빛의 파편이 할아버지의 눈앞에서 배꽃처럼 자잘하게 떨어져 흩날렸다. 마침내 기운이 다한 할아버지는 말채찍을 잘 걸어두고 해를 향해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이 셴 영감처럼 이 옥수수 종자가 열매를 잘 맺게 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이 셴 영감처럼 할 수 있겠느냐?”

햇빛 속에서 누런 모래 같은 쉰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깨진 꽹과리 소리처럼 이쪽 비탈에서 저쪽 비탈로 점점 희미해지면서 멀어져갔다. 셴 할아버지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갈대자리를 끌고 파놓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바로 옆에 엎드려 있는 개에게 말했다. 

“날 묻은 다음에 내가 알려준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샘물이 있는 골짜기가 나올 거야. 거기에 물이 있어. 게다가 늑대들이 먹다 남긴 뼈들이 사방에 널려 있지. 그곳으로 가면 흉년과 가뭄이 다 지나갈 때가지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바러우산맥 사람들이 바깥세상에서 돌아올 때까지 살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거든.” 해가 셴 할아버지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의 흙 알갱이가 달랑달랑 흔들리면서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말을 마친 할아버지는 손으로 머리에 있는 흙을 털면서 옥수수 뿌리털이 있는 무덤 벽에 바짝 붙어서 누웠다. 그런 다음 자기 몸 위로 갈대자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덮으면서 말했다. 

“어서 흙을 덮어, 장님아. 어서 나를 묻고 넌 북쪽으로 가거라.” 산맥은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지독하게 뜨거운 햇빛 속에 보일 듯 말듯 감춰져 있던 불꽃이 갑자기 거세게 치솟기 시작했다. 드넓게 펼쳐진 망망한 공간 속에 산등성이의 타는 냄새가 안개처럼 밀려 올라왔다. 산맥과 계곡, 마을, 길, 물이 메마른 강바닥 등 모든 곳이 오래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금과 은이 녹은 것처럼 걸쭉한 빛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