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순간

이춘아 2023. 12. 15. 09:49

데이비드 호크니, 마틴 게이퍼드,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시공사, 2022.


(35~36 쪽)
호크니: 그렇죠. 로널드 레이건은 우리가 미국삼나무 한 그루를 보면 그 나무들을 모두 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나무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저마다 다릅니다. 나무에 둘러싸인 채 그 나무들을 살펴보며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나무들의 생김새가 왜 지금과 같은 모양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무는 새 둥지처럼 보이지만 새 둥지는 아니죠. 실제로 새 둥지는 나무를 죽입니다. 사람들이 몇 그루가 이미 죽은 나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 나무들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잎사귀들이 돋아나고 있죠. 오른쪽 나무는 벚나무이고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3월 말에 꽃이 피죠. 그다음으로 배꽃과 사과꽃이 차례대로 핍니다. 이곳에는 사과주 길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만개한 사과나무 사이를 지나갈 수 있죠. 아름답습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과수원에서 함께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런 곳에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10년 전 브리들링턴 작업실 임대 계약서에 서명했을 때 나는 스무 살은 더 젊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활력을 되찾은 것 같았죠. 이곳이 내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지팡이를 짚고 걸었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는 지팡이를 잊어버렸습니다. 최근에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에는 지팡이를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죠. 나는 이곳에서 운동을 더 많이 합니다. 핸드폰에서 계산되는 걸음 수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이 집에서 작업실로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약 2킬로미터 정도를 걷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정원에서도 꽤 긴 거리를 걷습니다. 주변을 돌면 3킬로미터 정도는 너끈히 걸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이곳에서 작업실로 가기 전에 정문으로 걸어가서 목초지를 가로질러 작은 강가로 걸어 내려갑니다. 이 건물을 벗어나면 뜻밖의 즐거움을 얻습니다! 아름다움 작은 길들이 나타나는데 어느 길로 걸어가든 (하나같이) 모두 아름답습니다.  대부분의 길은 아주 작은 길이죠. 고속도로도 약 1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2시간 15분이면 파리에 갈 수 있습니다. JP는 몇 번 다녀왔습니다. 지금도 파리에 있죠. 그는 잠시 쉬기 위해 파리에 갔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온 이후 파리에 그다지 많이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진정한 낙원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곳은 내게 완벽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 그다지 관심 없습니다. 나는 나의 작업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지금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순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드로잉 방식에 다가가고 있죠. 이곳에서 그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런던, 파리, 뉴욕 등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바로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143~144쪽)
호크니: 지난 목요일 우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일몰을 보았습니다. 높은 구름이 많고 탁 트인 하늘이었기 때문에 일몰이 장관을 이루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저무는 해가 구름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서 보낸 저녁 시간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변화하는 하늘은 환상적이었죠!. 정말로가장 멋지고 화려한 빛의 잔치였습니다. 하늘은 어두운 회색과 흰색에서 시작되어 오렌지색과 빨간색으로 바뀌었는데 회색빛은 매 순간 변했습니다. 굉장한 장관이었습니다. 일몰 사진은 늘 상투적입니다. 단지 한순간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사진에는 움직임이 없고 따라서 공간도 없죠. 하지만 그림에는 움직임과 공간이 담깁니다. 태양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눈에 잘 띄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족히 수백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거리를 봅니다. 하지만 사진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하죠. 

나는 매일 마침 하늘을 바라봅니다. 매일매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조금 끼어 있다면 여명은 장관을 이룰 겁니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구름부터 물들일 테니까요. 찬란한 일출에는 구름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사실을 브리들링턴에서 알았습니다. 브리들링턴에서는 4월부터 거의 8월까지 플램버러 곶 위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남쪽으로 옮겨 가죠. 바로 여름 이맘때가 되면 나는 부엌 창문에서 보이는 해돋이를 그리는데, 해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12월이 되면 저 멀리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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