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문화적 기억, 웨딩드레스

이춘아 2019. 8. 9. 22:32

<나, 이춘아의 문화적 기억 5>

웨딩 드레스

2007.4.17


여러 가지 일이 겹쳐지면서 피곤하여 문화적 기억을 끄적거릴 시간이 없었고,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 등이 얽혀 써지지 않았다. 지난주 일요일 오후 중국작가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을 읽었다. 그 책을 읽다 다시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희영이가 생각나 이번 제목은 웨딩드레스로 하였다.

 

3월28일 결혼 날을 잡았다. 준비를 하면서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웨딩드레스를 맞추기 싫었다. 신랑 될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웨딩드레스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막상 드레스 할  생각을 하니 갑갑하다고 신랑될 사람에게 말했다. 30분 식장에 서있자고 비싼 옷 빌려 입고 싶지도 않다고. 신랑 될 사람은 선뜻 말하길 그러면 안 입으면 되지 않느냐, 고 하여 일사천리로 결혼준비에 들어갔다.


결혼예복은 직장에도 입고 다닐 수 있는 미색 투피스를 맞추었다. 결혼식 사진을 찾아서 본다. 그 미색 투피스는 어디로 갔을까, 신랑도 그때는 젊어 보인다. 나도. 그리고 여기저기서 아는 얼굴들이 새삼스럽다. 내 친구들도 신랑 친구들도 그때는 그나마 젊었었구나. 그 당시 신랑친구들, 이미 아저씨들인 친구들이 비아냥거렸었다. 그 나이에 뭐 장가들겠다고, 혼자 계속 살지. 그런 말이 나는 싫었었다.


신랑의 친구들 가운데 예술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이 늙은 신랑신부들을 위해 지금 생각해보니 이벤트 하나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들이 직접 내 반지와 목걸이도 디자인해주었고, 결혼식용 옷도 이리저리 알아보아 만들어주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겠다고 했더니,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없어 다행이었고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결혼식 당일 피아노는 엠비시 방송국 악단 지휘자와 합창단원 몇 명이 와서 피아노 반주와 노래를 불러주어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려서부터 우리들은 왠일인지 결혼행진곡 딴따따가 나오면 ‘속았구나 속았구나’를 부르곤 했었다. 그래서 평소 나의 걱정중 하나가 내 결혼식에도 그 결혼행진곡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속았구나, 속았구나’를 읊조리며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랬는데, 너무도 다행히 내 결혼식 입장곡은 영화 스팅에 나오는 경쾌한 피아노곡이 나왔다.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던 엄기형님에게 지금도 감사드린다. 경쾌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신랑신부는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우리는 신랑신부 동시입장이었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신랑신부가 식전에도 입구에 나와 손님맞이하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사회의 개식사가 있은 후에 그 당시 우리가 즐겨 불렀던 ‘천리길’을 모두 함께 불렀다. 그 가사를 다시 불러본다. 참 좋다.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 뚫고 솟아 와 새하얀 접시 꽃잎위에 눈부시게 빛나고 발아래 구름 바다 천길을 뻗었나 산 아래 마을들아 밤새 잘 들 잤느냐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입장할 때 결혼식 부케는 없었다. 친구들이 만들어보겠다며, 밤새 노닥거리다 늦잠을 자서 결혼식에 늦었기 때문이다. 결혼식 끝나고 친구가 만든 부케를 받아들고 사진을 찍었는데, 부케 만든다고 꽃을 하도 조물락거려 시들어있었다.


결혼 서약은 신랑신부가 각자 만들었다. 누가 먼저 그렇게 하자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주례 목사님이 먼저 선동했던 것 같다. 지금 그 서약서를 보면 낯 뜨겁다. 하지만 그 당시는 진지했었고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었다. 생각해보니 하기 어려운 것만 골라서 서약서에 썼던 것 같다. 그 서약서는 다음과 같다.


신부: 나 이춘아는 그대 김흥수를 처음 만나 사랑을 느꼈던 신선한 기쁨을 고이 간직하고 되새기는 영원한 연인이고자 합니다./ 공동의 문제는 늘 함께 계획하고 의논하고 협의하겠습니다. / 당신이 지쳐있을 때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겠습니다. / 나의 기도에 당신이 추구하는 관심사도 포함시키겠습니다. / 때로 격한 감정이 앞서 당신이 미워질 때 진심으로 싸우고 진심으로 화해하겠습니다. / 하느님 보시기에 흡족한 한 쌍의 남녀가 되도록 가꾸고 키워가겠습니다.


신랑: 나 김흥수는 그대 이춘아를 만나 같이 살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남편으로서 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남자로서 보다는 동료로서 그대와 함께 생활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 신나게 살아 봅시다.


신나게 산 것 같지 않은데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축가는 노래잘하는 합창단원들이 60년대 유행했다던 [열두냥짜리 인생] 대중가요를 불러 하객들의 배꼽을 잡았다. 결혼식은 엄중하지도 않고 유쾌한 세리머니로 즐겁게 끝났다. 다들 한마디씩 했다. 결혼식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였다.


우리 결혼식은 화제거리였다. 그 당시 동아일보가 <결혼풍조 이대로 좋은가>라는 특집을 실었는데, 총14편 중 2편에 우리 결혼식이 인용되었다. 결론인즉 검소한 결혼 사례로 인용하였다. 당시 돈이 없어 검소하게 되었지만, 설령 돈이 있다하더라도 그런데 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웨딩드레스를 빌려 입지 않았고, 동시입장에, 직접 작성한 결혼서약에, 화사한 피아노반주와 걸직한 노랫가락 등등.


나는 어려서부터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는 소리를 귀 아프게 들어왔다. 그 소리를 싫어하면서도 믿어왔는지, 직장생활 5년을 하였는데도 돈을 모아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신랑될 사람도 부잣집 사윗감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는지 그 사람도 돈 한푼이 없었다. 한푼은커녕 빚이 백만원이었다. 결혼하고 갚았다. 은행다니는 친구가 데이트비용으로 쓰라고 백만원을 빌려주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신혼방 한칸 전세가 5백만원이었으니까, 백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기자가 나를 인터뷰하면서 축의금이 얼마 들어왔냐고 물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돈 액수는 물어보나 했다. 그랬더니, 그 돈을 유용하게 쓰라고 했다. 방한칸 얻어 살면서 돈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던 것 같다. 방 한칸 얻는 것도 우리 직장에서 이춘아 결혼기념 계를 만들어주어 가능했다. 그 이후 우리 직장에서 내가 퇴직할 때까지 17년간 계가 지속되었다. 그 계를 통해 일산에 아파트도 마련했다. 그 때 나는 부조(扶助)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결혼살림 장만은 내가 필요한 물품을 리스트로 만든 다음 직장동료와 친구들에게 그 가운데 하나씩 찍으라고 하여 마련했다. 

지금 생각하면 뻔뻔한 행동이었지만 다시 한다 해도 나는 그렇게 할 것 같다. 합리적인 부조라고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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