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춘아의 문화적 기억 6>
디아스포라
2007.5.9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을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을 읽었다. 이 두 가지가 잠재되었던 나의 기억들을 후벼 팠다. 이 영화 제작자와 책의 저자의 공통점은 재일동포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서 나를 볼 수 있기에 나 역시 디아스포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의미속에 ‘추방당한’이란 표현을 하였지만, 나는 ‘떠도는 유민’의 의미로 디아스포라를 사용한다.
[디어 평양]이라는 제목, 영화를 보고서야 왜 ‘디어’인지 알았다. 9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겨레신문에 홍동근 목사의 ‘[미완의 귀향일기]가 연재되었었다. 홍동근 목사님은 편지 글머리에 늘 ’친애하는 oo 에게‘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디어 deer‘는 소위 ’친애하는 ... '라는 상징적 표현이다.
[디어 평양]에서 내가 감정이입된 부분은 다큐멘터리 제작자 양영희가 ‘디어 평양’ 추종자인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계속 질문하는 대목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는 시간은 몇 년간이지만 아마 디아스포라로서 평생의 질문을 안고 살아온 양영희가 아버지에 대해, 자신에 대해 던진 물음이었다고 본다. 나도 아버지가 오래 사셨더라면 저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했다. 물론 질문의 방향은 완전히 달랐겠지만...
나는 어려서 친구들이 제사를 지냈다며 가져온 음식들이 부러웠다. 어린 마음에 우리 집은 왜 제사를 지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인지 먼 친척이 찾아왔다. 그분은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자수하여 서울서 살고 있다 하였다. 그 분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음을 확인했다. 그 이후로 우리 집도 제사라는 것을 지내게 되었다.
과묵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가타부타 설명이 없는 편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는 것이 일종의 예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부모에게 질문할 거리는 많아지는데 그 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려 단편적인 기억들을 종합하며 정리할 수밖에 없다.
56년생인 나는 신물나게 통일노래를 불러왔다. 시대가 바뀌면서 통일노래의 의미는 달라져 갔지만, 어린 나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통일이 되면 큰일이다 여겨왔다. 이북에 처자를 두고 잠시 피난 내려왔다가 엄마를 만나 결혼해서 우리를 나은 아버지의 입장이 얼마나 거북할까 싶어서였다. 그 상황을 인정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우리 집이 파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우리 집이) 큰일이다, 라고 여겨왔었다.
90년경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북한방문 신청의 기회가 주어졌다. 신청서란에 방문의 목적이 있었다. ‘친지 방문’ 얼마나 떳떳한 목적이었던지. 나에게는 이름도 주소없는 오로지 구전으로만 내려왔던 오라버니와 언니가 북한에 살고 있어 그들을 방문하고 싶었다. 진짜 가게 되면 주소를 추적하여 찾아보아야한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병원이름을 당신이 살았던 동네이름을 따서 ‘광덕의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북한의 형제자매를 찾아가려면 함흥의 ‘광덕’이라는 지명을 찾아가서 알아 볼 셈이다. 아버지 생전에 찾아가보지 못한 것을 내 세대에서라도 가 볼 수 있을까.
부모님들이 ‘잠시 피난내려왔다’ 라는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6.25 전쟁 무렵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피난 내려왔던 아버지의, 어머니의 인생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 처자식을 두고 내려온 아버지, 북한에 약혼자를 두고 내려온 어머니는 피난 내려오는 배 안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좋게 말하면 사랑이고 다른 말로 하면 불륜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너무 너무 잘생겼다’ 하였다. 불륜의 관계가 전쟁으로 인해 남북으로 나뉘고 난후 합법이 된 것이다.
도서관 서가에서 최인호의 [나는 지금도 스님이 되고 싶다]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앗 저 표현은 바로 우리 아버지의 멘트인데 활자로 찍혀 나오다니. 대학 다닐 때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결혼해서 살 것 뭐있냐, 하셨다. 나는 지금이라도 너희들만 아니면 스님이 되고 싶다 하셨다. 옆에 있던 엄마는 스님보다는 수녀가 낫지 않느냐고 하셨다. 남들은 어떻게 하면 딸을 잘 결혼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부모는 딸이 스님이나 수녀가 되었으면 했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없이 사셨던 아버지는 결국 심장이 터져 돌아가셨다. 중국작가 위화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원제목은 활착(活着)이다. 활착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생소했다. 그러다 며칠 전 나무심기 관련 공문서에서 나무의 활착력을 돕기 위해 뿌리 돌리기 등의 작업을 해야한다, 라는 표현을 보았다. 나무의 활착(活着)은 땅에 뿌리내려 활기차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활착(活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개개인의 인생은 여러 가지, 제각각의 색으로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사람의 무리는 ‘그저 살아가면서 활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원한 디아스포라로 생명이 주어지는 그 시간까지 그저 살아갈 뿐. 인류의 이동 루트를 보면 살 길을 찾아가다보니 그 루트가 만들어진 것이지, 루트를 만들기 위해 이동을 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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