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춘아의 문화적 기억 10> 좋은 사람, 나쁜 사람 2007. 9. 28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어나 몸 풀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의 몸 세포 하나하나에 집중해보려고 하지만 어느 사이에 나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늘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평가였다. 누구는 어떤 사람이고, 누구는 어떤 사람이다 하며 편을 가르고 있었는데, 그 편 가르기의 잣대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하는 것이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판별하는데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은 동물적인 본능 같은 것이어서 내가 살기위해 적과 동지를 빨리 구분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동물적인 본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한결 명료해지긴 했지만, 참으로 오랜 시간을 투자하면서 우리는 때로는 타고난 감각으로, 때로는 학습을 통해 재빠르게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별해오곤 했다. 대표적인 정치적 학습이 빨갱이로 구분하게 했고, 악의 축으로 지칭하게 했다. 자라오면서 나는 비교적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왔고,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내 짝지는 날카로운 아이였고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불리어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싸우곤 했다. 심지어는 내가 궁지에 몰리면 나를 대변하여 싸워주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직장에서 노조위원장이 되었다고 그 친구에게 말했을 때 첫 말이 내가 하면 잘할텐데 네가 어떻게 하겠냐고 했는데, 그 말은 자신은 잘 싸울 수 있지만 네가 잘 싸울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 걱정도 적과 동지를 순간순간 판단하여 냉철하게 싸울 수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잘되겠냐 하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늘 누구에게도 내가 나쁜 사람으로 비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 우선되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우리들 노사간에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은 누군가가 나쁜 사람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매도당하기도 하는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겉으로는 잘 지내던 직장동료들이었는데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직급간의 구분에 의해 어느 순간 적과 동지로 구분되었고 그것이 시스템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했지만 막상 노사교섭에 들어가면서 치열한 싸움이 되었고, 누군가는 나쁜 사람이 되어야했다. 내 동지들이 나를 밀어주었기에 나는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나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점점 내가 나이가 들어 나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정말 내가 나쁜 사람으로 몰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되다니, 였다. 하잘 것 없는 나의 위치도 소위 문화 권력이 될 수 있고, 나를 악의 축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교적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이가 들어 유연해진 것일까, 적과의 동침까지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오늘도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판별하는데 시간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줄여가려고 노력은 해야겠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