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2007.10.25
이춘아 유성문화원 사무국장
잊지도 않고 간간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몇 장면들은 왜 그리 뚜렷하게 각인되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중 한 장면은 이런 것이다. 몇 해 전 남편의 스승의 집을 방문했다. 이사하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노부부만 사는 그 집의 거실 큰 식탁위에는 뭐가 잔뜩 쌓여있었다. 나중에 꼼꼼히 읽어보리라 하고 밀쳐두었던 것들이 이삿짐 정리하면서 나왔던 것인데 이제 챙겨서 보려고 한다고 하셨다.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부인이 돌아가셨다. 나는 그 분이 그것들을 다
챙겨보고 돌아가셨을까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을 떠올리며 궁금해 하곤 한다. 우리 집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짬짬이 읽어보리라 하고 쌓아둔 것들이 많다. 그것들을 누가 다 갖다버려도 어쩌면 아쉬울 것이 없을지도 모르는데도 숙제거리처럼 쌓아두고 있다. 아마도 나 역시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죽기 전에’ 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여행지 33] [죽기 전에 꼭해야할 88가지]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할 50가지 먹거리] [죽기 전에 봐야할 영화 1001편] [죽기 전에 꼭 들어야할 가요 100곡] 등 ‘죽기 전에’ 시리즈가 생각보다 많다. ‘100배 즐기기’라는 단어가 유행하더니 그보다 더 강조 어법으로 ‘죽기 전에’ 시리즈가 나왔다.
정말이지 우리는 죽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을까, 궁금해서 대표적인 케이스로 ‘죽기 전에’ 시리즈 책들의 제목을 찾아보니 평소에도 우리가 늘 하고 있는 보고, 듣고, 먹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그만큼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오감 채우기에 지루해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3곳, 국내 편과 세계편의 목차를 훑어보았다. 국내 편에는 바다, 산, 꽃, 강을 주제로 선정되었고, 세계 편에는 대자연, 섬과 바다, 인류유산, 삶의 모습, 문화도시, 옛 마을 등을 다루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33곳은 너무 많다. 얼마 전에 나온 어떤 책은 딱 6곳이었다. 그 정도면 도전해볼만한 것 같은데.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곳을 꼭 가보고 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까, 어쩌면 좀 더 악착같이 살아서 다른 곳도 찾아가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있으면 ‘죽기 전에’ 시리즈는 ‘살아생전’으로 바뀔 것이다. 살아생전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낸 감동적인 수기를 읽었다. ‘문화의집’이라는 문화 공간 이용자 수기로 댄스 스포츠 강좌에 참여한 한 남자어르신의 글이다. “노인이라는 참담한 허울을 벗어던지고 조금 망가지는 쪽으로 문을 열었다. 내 인생 고쳐 쓰기 하자고. 우리회원 모두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불사영생의 욕망을 피워 올린다. 누구든 댄스스포츠에 빠져보시라. 문득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 혼자 상심을 삭이는 분을 위해서라도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 문화의집 취미프로그램 참여해보시라, 제2의 가정이며 외로움을 탈출하는 해방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