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춘아의 문화적 기억 12>
길은 사이에 있다
2007. 11.21
길은 가기 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길은 사이에 있다’라는 문장에 눈이 고정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니 그러한 것 같다. 길이 있어 가기도 했겠지만, 늘 사이는 있었고, 그 사이 속에서 길을 만들어갔다. 극단을 좌충우돌하면서 힘겹게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교묘하게 가능한 부대끼지 않고 피해가는 길도 있다. 그렇게 길을 만들어가며 살아왔고, 늘 사이는 존재했다. 때로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거부라는 이름으로 사이를 띄우기도 했다.
‘길은 사이에 있다’라는 글귀에 숨이 턱 막힌 걸 보면, 이제 가고 싶은 길을 말하기보다는 사이를 말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은 궁금했다. 내가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저 길로 가면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궁금해 하며 따라 가다보면 영영 되돌아오지 못할까봐 이다. 그 궁금증이 사라져도 곤란하겠지만 이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도 있었음을 인정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신작로라 불리던 길. 버스가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사라져가는 점을 보며 궁금했었다. 길을 보면 늘 떠나고 싶었다. 역마살이 있나 했다. 세계지도위에 그어진 인류의 이동경로를 보면서 사람의 DNA 속에 수많은 길이 새겨져있었음을 알고 안심했다. [나는 걷는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사이의 풍경이 있었기에 읽었지만 참으로 지리한 길을 독자인 나도 함께 걸었다. 인류가 만들어놓은 길을 그야말로 ‘따라’ 걸음으로써 거꾸로 자기를 찾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사람들의 흔적이 곧 길이었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과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삶의 흔적들이 보인다. 현재 나의 직업과 관련한 문화적 삶은 흔적을 만들려는 몸부림이고 한참 세월이 지나 누가 보아도 하나의 통일된 형태의 그림이 그려지면 그것은 사이를 통과해온 축적된 양식의 문화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사이’의 존재를 인정하자고 하면서 서둘러 결론을 내리는 성급함을 탓하며 다시 사이를 찾아 나선다.
길을 가다 만난 것일까, 가다가 만나서 놀다보니 길을 가게 된 것일까. 사이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人間)인 것일까. 때로는 개인으로 때로는 집단의 형태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전환점에는 늘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고 그들을 각별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각별한 사람이었지만 길이 달랐기에 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분명 각자의 길은 있다. 길과 길 사이에는 사이가 있고, 사이와 사이 에는 길이 있다.
세계 전도에는 사이가 보이고 지도에는 길이 보인다. 사람은 사이에 있다. 나는 길 위에 있다. 사이를 재면서 길을 간다. 사이가 보이면 멈춰 있다가 사이가 보이지 않으면 길을 간다. 아니다. 내가 길을 만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이가 길을 만들어주었다. 어쩌자고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