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생각의 길

이춘아 2019. 8. 5. 18:29


[대전일보] 한밭춘추 기고 9 (2011년 10월28일자)

 

생각의 길

이춘아 한밭문화마당 대표

 

 

김훈의 최근 소설 [흑산]에서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 라는 대목에 눈이 멈추었다. ‘생각’은 무궁무진, 방대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던 것인지 ‘길’이 있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생각의 길’은 있는데 길처럼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각을 이어가는 길을 만들지 않았다. 아니 만들 겨를도 분명한 의지도 없었다.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면 나중에 생각해봐야지 하면서 끊어버린다. 각종 아이디어가 난무하는 회의는 즐기나 합의된 아이디어를 지속시킬 궁리가 없다. 무언가를 정책화하기 위해서 비전을 설정하고 핵심시책과 추진전략 등을 나열한다. 열심히 연구하고 아이디어를 모았으나 그것은 유행하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거나 이런 저런 정책과 크게 차이가 없다. 실천가능한 단어들을 만들어내지 않은 탓이다.

 

비전이란 무엇일까, 다가올 미래를 상정하고 이를 위해 매진할 수 있는 핵심가치를 만들고 전략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까지는 이해했는데 생각을 좀 더 길게 하여 길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익혀내지 못한 단어들을 나열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 것 같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소개하는 글 한 대목에 밑줄 긋고 내 식으로 이렇게 해석했다.

 

잡스의 마지막 비전은 ‘통합된 형태의 TV를 만들고 싶다’였다. 그 비전에 따른 전략은 ‘기존의 다른 전자기기와 충돌 없이 동기화되고, 가장 단순한 사용자 환경을 가진 TV’이다. 오감 일체의 기기 통합형을 만들기 위해 기존 제품들간의 충돌을 없앨 수 있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실험을 하였을까, 사용자들이 가장 단순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의 길이 이어지고 이어졌을까.

 

얼마 전 <문화도시․학습도시․창조도시를 통합/네트워크 모형연구>를 위한 델파이조사에 응한 적이 있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유행처럼 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세 개 단어의 도시를 제각각 브랜드화 하고 있지만 지역주민에게 전달되기 이전에 정책 운용자들 간에 개념들이 충돌되고 그게 그거지로 정리되면서 두루뭉술해진다. 그래서 소비자인 지역주민 역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뭐든지 그런 도시가 되면 좋지, 하면서 부스러기 사업에 친구 따라 이러 저리 몰려다니다 유행이 지나면 폐기해 버린다. 행태의 반복 속에서 길게 생각해본 적 없고 자극과 반응의 단순생물체로 남겨지게 된 것은 아닐까.

 

요즘 유행하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 인문학적 접근이라는 화두 속에 여기 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기웃거리지만 말고 내 생각부터 길게 해볼 일이다. (두달동안 매주 연재했던 칼럼을 9회로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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