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삶의 흔적

이춘아 2020. 2. 29. 00:03

 

2001년7월31일

 

삶의 흔적

 

문화유산을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인이14세기 청자가마터에서 주어 온 도자기 파편을 가져와 자랑을 하였습니다.공주지역 문화답사를 가고 있던 차 안에서였습니다.저와 같이 간 우리 집 아이가 물색없이 아저씨 이거 나 하나 주세요,라고 하여 저를 당황케 하여 눈치를 주었으나 막무가내로 우겨 하나를 갖게 되었습니다.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조각에 도공의 지문까지 묻어있다는 설명에 아이는 혹하여 이왕이면 옛 선조의 지문이 박혀 있는 도기조각을 갖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하고 있는 문화유산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 왜 나는 이 나이에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입니다.아이의 반응을 보면서 바로 저런 것,우리 것에 대한,나의DNA에 축적된 흔적을 막연하게나마 찾아가고자 하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대전지역의 송촌동이라는 동네에는 송씨들의 집성촌이 있습니다.그 중 오늘날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춘당 송준길 가옥,송용억 가옥 등이 송씨 문중의 흔적을 보전해주고 있습니다만1995년의 송촌지구 택지개발과 도시개발로 인해 역사적 문화환경은 훼손되었습니다.오늘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부 남은 유형의 문화재를 통해 당시를 역사적 문화적 상상력으로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본다는 것입니다.

 

대전지역은 유학자중심의 문화가 지배적이어서 남성중심의 이야기가 주입니다만 송용억 가옥이란 곳에서는 여성들의 삶의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어 뜻밖의 소득을 얻은 듯 합니다. 2001년 현재 아흔이 가까운 나이이신 송용억 어른이 살고 있는 그 가옥에는 그 어른의 할머니인 권씨(1855~?)가 기록으로 남긴[주식시의(酒食是儀)]가 있습니다.이 책은 총119쪽으로 구성된 언문필사본이라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100여년전 송촌 사대부 집안의 요리법,염색,세탁법,출산을 전후한 여성 질병의 민간치료법 등을 수록한 여성용 백과사전적 책이라 합니다. 19세기 조선시대 선비가문의 생활사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문입니다.

 

또한 시대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여류문학자 허난설헌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는 호연재 김씨(1681~1722)가 이 집에 살았습니다.호연재 김씨는 군수를 지낸 안동 김씨 김성달의 딸로19세에 이 집으로 시집을 와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100여편의 시문을 남겼습니다.이 시문들은[오두추도] [호연재 유고] [자경편]이라는3책으로 필사되어 전해내려 오다가1995년 책으로 간행되기도 하였습니다.시재(詩才)가 뛰어난 집안 출신인 호연재 김씨는 조선후기 사대부집안 여성의 절제된 감정과 사유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합니다.

 

호연재의 시 가운데<봄의 회한>이란 시가 있어 소개합니다.

 

<봄의 회한>

복사꽃 어지러이 떨어지고

배꽃은 향기로운데

나비는 분분히 날아

작은 당(党)을 둘러싸고 도네

적막한 공산에 봄은

저절로 가는데

저녁햇살에

이별의 시름이 길구나

 

사랑채만도 두 채인 것이 특징인 이 집안이 당시 선비들과 지역주민들의 왕래가 빈번한 사대부 집안으로 손님접대만으로도 바빴을 당시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호연재 김씨는 외로움,그리움,회한으로 봄을 읊었고 글로 남겼습니다.

 

시대를 달리하였지만 한 집안에서17세기 호연재 김씨는 여성들의 감성을 시문으로, 19세기 권씨는 여성들의 실생활사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그 기록을 통해 옛 여성들의 삶의 흔적을 전해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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