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우리안의 보물

이춘아 2020. 2. 28. 23:47

 

우리안의 보물

 

2001.7.13

 

온천도서관 서가에서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뽑아듭니다.오래전 재미있게 읽었던 책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었던 책입니다.요즘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하면서‘문화유산’이란 단어가 예사롭지 않아졌고 하여 답사기를 어떻게 썼는지 슬쩍 훔쳐보는 입장이 되어 빌려옵니다.

 

이게 웬 일인가요. 1993년 이 책이 발간되어 불티나게 팔릴 때 나도 분명히 읽었는데 그중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겠고 마치 처음으로 그 글을 접하는 사람인 듯 읽고 있습니다.그 당시 밤새워 뚝딱 읽었음직한 그 글 하나하나에 눈이 멈춰 옮겨지지 않습니다. 7-8년이 지나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있는 이즈음에야 알 수 있는‘정면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집’이란 용어를 당시에는 어떻게 이해하고 읽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그러니까 당연히 그 어떤 문장도 지금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요.

 

그 분야에 축적된 지식 없이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한계,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다 라는 명문을 또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아마 그 당시는 휴가 때 어디 가 볼만한 곳은 없는지 하고 들쳐보는 안내잡이 책으로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그러다 저자의 글발에 눌려 그냥 재미있게 읽고 이만 끝,했던 것입니다.

 

대전의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답사하면서 총동원되었던 감수성으로 글을 읽습니다.글 한줄 한줄에 상상력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심지어는 텔레비전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산천의 한 장면 한 장면에도 아!,하는 감탄과 탄식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이러한 변모된 감수성으로 가득 차 있는 저에게“땅의 의미란 그런 것이다.모르고 볼 때는 낯선 남의 땅이지만,그 역사적 의미를 알고 보면,내 나라의 땅,우리의 땅으로 느껴지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 유홍준 교수의 글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대전의 유일한 보물인‘동춘당’을 역사적 기록을 더듬는 답사 한번,건축적 기록을 더듬는 답사 한번,그렇게 두 번을 보고 왔습니다.조선 중기의 학자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고택에 딸린 부속 별당으로 간소하면서도 단아한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하여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입니다.이 별당 정면에는1678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同春堂]현판이 있다고 하는데 답사 갈 당시 내부 수리중이어서 따로 보관된 현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집자리를 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집을 앉히는 과정 등의 설명을 듣습니다.옛선비들은 집이라는 건물에 담겨질 사람들의 숨결과 정신을 존중했었고 그 정신으로 집을 지었다고 강사선생님이 설명해 주십니다.그리고 그 지역이 담아냈을 당시의 분위기를 역사적 상상력으로 더듬게 해주십니다.

 

17세기 중반 무렵 대전 대덕구와 동구 일대는17세기 기호문화의 대가들이 거주하였고 시국을 논했던 장소입니다.당시 삼송(三宋)으로 꼽혔던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제월당 송규렴,그리고 쌍청당 송유의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고 박팽년 유허비가 있는 곳입니다.그들의 당호를 딴 별당 가운데 송준길 선생의 별당인[동춘당]이 보물제209호로 지정된 것입니다.보물로 지정된 내용의 핵심은‘선비의 단아한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이란 것입니다.

 

검소함과 은둔자적 정신,배고파도 내색 않으며,아무리 바빠도 뛰지 않는 선비들의 강직함에 대해서 옛 형식적 겉치레로 간단하게 치부해 버려 온 우리의 얄팍함에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그 분들은 돌아가셔도 그들의 숨결이 살아있었을 건물로서나마 버티고 있게 하여 오늘의 우리를 반성하게 합니다.엉엉 땅을 치며 통회의 시간을 갖고 난 다음에야 다른 장소로 발을 옮겼어야 마땅할 터이라 이제야 생각됩니다.

 

아파트 몇 평에 얼마짜리로 기준을 정해버리는 집에 대한 우리의 경박함에 대해 답사를 안내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건물은 주인의 숨결을 먹고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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