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낭독 봄

이춘아 2020. 3. 11. 07:35

 

2020. 3.11(수)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가 잠시 가출을 해서

오늘은 다른 책으로 바꾸었습니다.

[체리토마토파이](베로니크 드 뷔르/이세진 옮김, 2019, 청미)

이 책 역시 고사리 책읽기 낭독 후보에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잔 할머니(90세)의 일기 형식의 소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월 20일 금요일

 

봄의 첫날 하루를 밖에서 보냈다. 오늘 아침, 잠시 텃밭에 나갔다. 과실수에 꽃이 피었다. 창틀 옆 복숭아나무에는 분홍꽃이 피었고 빨랫줄 맞은편 벚나무들도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꽃이 다 피었다. 지난 달에 정원사가 나무딸기와 까치밥나무 가지를 정리해주어서 아주 보기가 좋다. 그가 아스파라거스 고랑에서 잡초도 다 뽑아놓았는데 올해 소출이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고 5월 초까지 기다려봐야 한다. 나는 아스파라거스 수확할 때가 정말 좋다! 재미도 쏠쏠하고, 하얀 순을 잘 보고 줄기가 부러지지 않게 흙을 살살 훑어내려면 눈썰미도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작년엔 아스파라거스가 잘 안됐다. 아스파라거스를 재배하는 지역이 아니니만큼 토양이 잘 안 맞는건가 싶기도 하다.....

 

점심을 먹고서 바깥에서 커피에 밀크초콜릿 한 조각을 곁들여 먹었다. 그러고 나서 무리 지은 장미나무 화단 옆으로 등나무 의자를 끌고 갔다. 장미는 아직 피지 않았지만 가지는 다 예쁘게 다듬어두었다. 매년 2월부터 나는 전지가위를 들고 가지마다 눈 세 개씩만 남기고 다 쳐낸다. 가지치기도 오래 하면 허리가 쑤시고 아프기 때문에 매일매일 조금씩 일한다. 봉오리가 벌써 많이 올라왔다. 머지않아 꽃이 만발할 것이다. 조금 아래, 테라스로 이어지는 양지 반 음지 반 내리막 길에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진달래와 수국이 피었다. 월초에 수국을 밀어내어 커다란 회색 꽃은 다 떼어버리고 새순이 돋을 때까지 겨우내 내버려둔다. 진달래 발치에서 노란 수선화들이 태양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폭발적인 노란색이 보라색 방울꽃, 향기 그윽한 하얀색 히야신스와 어우러진다. 

 

나는 안락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알키비아데스]를 몇 쪽 읽다가 따사로운 햇살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사람이 고목 같다. 노인네들도 날씨가 좋으면 슬슬 되살아나고 조금은 푸릇해진다. 한 해 한 해가 예전 같지 않지만 말이다. 화창한 봄날은 우리가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3월 21일 토요일

 

볕 좋은 오늘 아침, 정원사가 모종 포트를 바리바리 싸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나는 진즉에 일어나 있었다. 새벽부터 새 소리에 눈이 절로 떠진다. 몇 주 전부터 짹짹대는 새 소리가 점점 더 일찍 들리는 것 같다. 일단 깨면 도로 잠들기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수면 부족으로 하루 종일 멍하다. 그렇다고 창문을 닫아버리면 나중에 너무 덥다. 르네가 있을 때부터 계절에 상관없이 늘 창문을 열고 잤기 때문에 습관이 들었다. 공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어야 잠이 잘 온다. 그리고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아주 좋아한다. 

 

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에게는 십자말풀이로 단련된 어휘력이 있다. 티티새, 박새, 카나리아, 꾀꼬리, 찌르레기, 칼새, 할미새, 방울새, 나이팅게일, ...... 박새나 딱새 같은 이름은 참 재미있다. 이름만 주어섬겼지 이 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체로 잘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울새도 한 마리 들어왔다. 새는 널찍한 나무 식탁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날아갔다. 요 작은 새들은 사람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곧잘 폴짝폴짝 뛰어오곤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는 뻐꾸기다. 뻐꾹뻐꾹 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지만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머나먼 시간으로부터 밀려 올라오는 감미로운 느낌..... 그리고 제비도 있다. 제비는 봄을 알리기도 하지만 낮게 날아 비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집 앞 잔디밭도 원형 화단 근처와 울창한 나무 주위로 서서히 색이 돈다. 그 나무 이름을 들어보긴 했는데 여태 못 외웠다. 노란색, 파란색, 흰색, 연보라색이 여기저기 감돈다. 노란색은 민들레, 미나리아재비, 앵초꽃이다. 파란색은 수레국화, 흰색은 데이지, 연보라색은 제비꽃과 붉은 토끼풀이다. 나 어릴 적에는 붉은토끼풀을 따서 꽃잎 아래 달콤한 꿀을 쪽쪽 빨아먹곤 했다. 들꽃을 꺾어다가 자그마한 유리잔에 담으면 그 자체로 예쁜 꽃다발이 된다. 

 

정원사는 삽, 쇠스랑, 양동이를 가지러 지하실에 내려갔다. 돌계단으로 초록색 호스를 끌어 올려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원형 화단에 삽으로 구멍을 여기저기 팠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팬지 모종을 포트에서 들어내고는 뿌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흙덩어리를 살짝 흔들어 털어주었다. 모종을 하나씩 심고 주위에 흙을 약간 돋운 후 물을 뿌렸다. 오전이 끝나갈 무렵, 몇 시간 전만해도 우울하고 시커멓기만 했던 화단이 초록 이파리와 알록달록한 꽃봉오리로 화사해졌다. 

 

정원사에게 봄을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3월 23일 월요일 

 

봄이 왔으니 꽃이 돌아오듯 앙젤도 돌아올 것이다. 기분이 좋다. 앙젤은 작년 초여름부터 류머티즘 때문에 일을 쉬었다. 등이 굽고 뼈가 휘었다는 둥, 병원에서 안 좋은 말을 많이 했다. 앙젤은 살림 돕는 일을 그만두었고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우울하게 지냈다. 그런데 겨울 끝자락에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몇 달째 꼬부라졌던 허리가 하루아침에 쫙 펴졌다나! 이제 앙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다시 일하고 싶어 한다. 앙젤의 기적적인 회복, 우리 고장에서는 요즘 다들 그 얘기밖에 안 한다. ‘누군가’를 만나고 와서 좋아졌을 거라고들 떠드는데,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고 앙젤도 얘기를 하지 않는다. 어제 오전에 미사를 드린 후 마트에서 우연히 앙젤을 만났다. 허리도 꼿꼿하고 아주 활기차 보였다.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무슨 상관인가. 앙젤이 좋아졌으면 된거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앙젤은 힘들어했고 매사를 비관적으로 보았다. 나와 질베르트는 그 자리에서 당장 예전처럼 우리들 집에서 일을 해달라고 말했다. 화요일과 금요일은 질베르트네로 가고 목요일은 우리 집으로 오기로 했다. 

 

앙젤이 몸이 안 좋아 고생하는 동안 질베르트는 자기네 마을 여자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나갔고 나는 마리데 부인을 불렀다. 내가 독거노인인데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편지를 썼더니 그녀는 즉시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마리데부인은 일에서 은퇴한 지 좀 된 사람이었지만 다들 일주일에 하루 일하는 정도는 오히려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마리데 부인을 아주 좋아한다. 그녀는 늘 쾌활하고, 일도 뚝딱뚝딱 잘하고 고장 돌아가는 소식도 전해준다. 일주일에 세 시간, 그녀가 와 있으면 사람 사는 집 분위기가 난다. 게다가 갈 때는 꼭 우리 집 쓰레기봉투를 도로변 쓰레기 수거함에 내놓아 준다. 그 수거함이 워낙 높아서 나는 까치 발을 해도 쓰레기봉투를 집어넣기가 힘들다. 앙젤의 회복 소식을 알려준 사람도 마리데 부인다. 나는 너무 주책으로 보일까봐 누가 앙젤의 허리를 고쳐줬는지 아느냐고 묻지는 못했다. 

 

지난주에 마리데 부인이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일을 하고 갔다. 목요일이면 앙젤이 일하러 오고 마리데 부인은 다시 은퇴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도 부인은 나에게 살갑게 뽀뽀를 하고는 쓰레기 봉투를 챙겨 들고 떠났다. 

 

 

3월 25일 수요일

 

수프를 만들었다. 버터를 조금 넣고 파 세단과 호박 두 개를 볶아서 물을 붓고 굵은 소금으로 간을 한 후 불 위에 올려둔다. 전체를 갈아야 할 때가 됐는데 핸드블렌더가 어디 있는지 못 찾겠다. 내가 핸드블렌더를 어떻게 했더라? 딸애한테 물어봐야겠다. 걔는 내가 만든 수프를 꼭 한번 더 갈아야 직성이 풀리는 애다. 분명히 걔가 지난번에 왔을 때 쓰고서 아무 데나 두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핸드블렌더는 오븐 오른쪽 휘젓개와 착즙기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없다. 그래서 옛날식으로 해보았다. 샐러드용 채소를 바구니에 넣고 창밖으로 흔들어 물기를 빼고 고기도 다 식칼로 다지던 시절처럼. 나는 솥 안의 내용물을 알루미늄 매셔로 으깼다. 조금씩 넣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용물이 꽉 차 있을 때에는 솥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다 쏟아버릴까 봐 겁이 나서 솥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했더니 사방에 초록색 국물이 튀어 청소거리가 늘었다. 조그만 손잡이를 하도 오래 돌렸더니 나중에는 팔에 감각이 없었다. 나는 완성된 수프를 커다란 터퍼웨어에 담고 냉장고에 넣었다. 앞으로 닷새는 두고 먹을 수 있다. 닷새 내리 먹고도 남으면 얼려서 보관한다. 토마토 쿨리나 라타투이유처럼 데워서 먹으면 된다. 

 

저녁 식사를 가볍게 하고 일찌감치 침실로 올라왔다. 내가 수프와 요구르트로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해가 남아 있었다. 내일은 목요일이고 아침 9시 정각에 앙젤을 맞이하려면 나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때까지는 아침 식사가 끝나 있어야 한다. 앙젤은 늘 주방부터 일을 시작하는 데다가 그녀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를 닦는 동안 잠옷 바람으로 빵을 집어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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