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3(금)
법정 스님의 글은 전 국민이 사랑했습니다. 스님의 글은 참으로 편하게 읽힙니다. 낭송용으로 발음하기 좋은 문장이기도 합니다. 김영하 작가가 책읽어주는 팟캐스터를 하면서 ‘입맛’이 좋다는 표현을 했는데, 법정 스님이 글이 그러합니다.
법정, [일기일회], 문학의숲, 2009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 2007년 3월4일 겨울안거 해제
.............. 20년 전 제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겪은 일입니다.
산치 탑을 참배하고 나서 아잔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산치 탑으로 가려면 뉴델리에서 급행열차로 14시간 30분이 걸립니다. 그리고 다시 산치에서 아잔타까지는 보팔에서 뭄바이행 열차를 타야 합니다. 보팔은 제가 그곳에 가기 5년전(1984) 미국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 사의 독가스 공장이 폭발하여, 2,500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도시입니다.
보팔에서 밤기차를 타야 하는데, 승차권은 있어도 좌석이 없다고 했습니다. 입석입니다. 그다음 날도 좌석은 보장할 수 없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그 기차를 타야만 했습니다. 인도는 단체가 아닌 개인이 여행하기에는 교통수단이 아주 열악한 곳입니다. 20년 전의 사정이 그러했습니다.
겨우 열차에 올랐지만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습니다. 통로까지 사람이 꽉 들어차 다들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살피다 보니 화장실 옆 통로 한쪽에 겨우 한 사람이 앉을 만한 틈새가 눈에 띄었습니다. 인도의 열차는 객차와 객차 사이가 막혀 있고 창문마다 철책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자리 잡은 곳은 좌우로 두 개의 화장실이, 소위 인도식과 서양식이 마주하고 있는 출입구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숄을 깔고 앉았습니다. 두 화장실 틈바구니에서 밤을 새울 걸 생각하니 무척 난감했습니다. 오기로 버티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때마다 역겨운 지린내를 맡아야 하고 배설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계속해야 하나?’
처음에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정이 되자 문득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러 나선 수행자가 아닌가. 옛날 구법승들은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그 험난하고 위험한 열사의 사막길을 건너왔는데, 그래도 나는 항공기와 열차를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승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먼지 바닥에 주저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한다. 똑같은 인간인 내가 저들이 견디는 일을 견딜 수 없다면, 나는 저들과 같은 인간 대열에도 낄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겪는 일을 나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득 ‘관념의 차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부터 화도 불만도 사라지고 마음이 더없이 평온해졌습니다.
그토록 혼잡한 열차 안이었지만, 그날 밤에는 당시의 인도 여행 중에서 가장 맑고 투명한 의식 상태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 화장실 앞에서 어떤 성지에서보다도 평온하고 순수한의식 상태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 6시 아잔타 석굴에서 가장 가까운 60킬로미터 거리의 잘가온 역에 도착할 때까지 저는 지극히 평온한 선열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선정삼매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전날 14시간 반이나 기차를 탔고, 지난밤에도 8시간 반을 그 틈새에서 지냈는데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화장실 앞 틈바구니가 저에게는 고마운 도량이었습니다. 그 어떤 선원이나 명당보다도 고마운 도량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이 천당으로 변할 수 있고, 천당이 지옥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을 어떤 특정한 장소로 한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일터가 진정한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도량이 없으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립니다. 분별과 집착을 떠나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깨달음을 얻는 곳이 곧 도량입니다. 좌청룡, 우백호 다 갖춘 명당에 있어도 직심이 없으면 진정한 도량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도량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그대가 있는 바로 그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