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15(일)
1997년 김화영의 번역으로 장 그르니에의 [섬]이 출판되어 나왔을 당시, 문학청년들은 이 책을 한권씩 끼고 다녔다고 합니다.. 문학 교본처럼 여겨졌다는 [섬]은 카뮈의 서문으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카뮈의 서문을 옮겨 적었습니다. 좀 깁니다만 낭독하기에 좋은 문장입니다.
장 그르니에, [섬], 김화영 옮김, 1997, 민음사.
섬에 부쳐서
- 알베르 카뮈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시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준 계시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지드적인 감동은 우리들에게 찬양의 감정과 동시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남긴 것인 반면, 이 책이 보여준 바는 우리들에게 알맞은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모랄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 지상의 풍성한 열매들을 노래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으로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들 중의 몇몇 사람들에게 가난과 고통은 물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었다. 다만 우리들은 우리들의 피끓는 젊음의 온 힘을 다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세계의 진실이란,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나누어주는 즐거움 속에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감각 속에서, 세계의 표면에서, 빛과 파도와 대지의 좋은 향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지상의 양식]이 그 행복에의 초대와 함께 찾아온 것이 우리들에게는 너무 뒤늦은 일이었다는 점은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행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오만한 직업으로 삼고 있는 터였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탐욕으로부터 좀 딴 곳으로 정신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우리들의 저 야성적인 행복으로부터 깨어날 필요가있었다. 물론 음울한 설교자들이 이 세상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들 위에 저주의 말을 던지면서 우리들의 바닷가에 서성거리기라도 했더라면 우리들의 반응은 격렬하거나 혹은 지극히 냉소적인 것이었으리라. 우리들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이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곧 그 어느 시대에나 한결같은 이 거대한 테마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새로움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다, 햇빛, 얼굴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려지고 여전히 그 매혹은 살아남았으되 우리들에게서 점차 멀어지는 것이었다. 요컨대 [섬]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발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문화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우리가 우리의 왕국으로 여기고 있던 감각적인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와 병행하여 우리들의 젊은 불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체험한 감격과 긍정의 순간들은 그르니에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들의 원칙이거니와 그는 그것의 영원한 흥취와 동시에, 그덧없음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곧 우리들은 우리가 돌연히 느끼곤 했던 우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삶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그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둥근 구릉들로 진종일 마음이 흡족해진 삶들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 속의 타고장뿐이다. 이리하여 북쪽 사람들은 지중해 기슭으로, 혹은 빛의 사막 속으로 도망쳐 오지만, 빛의 고장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밖에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상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의 여행,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이다. 그것은 멜빌이 [화요일]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 보여준 순례와 마찬가지이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책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간접적인 해답을 얻을 뿐이다. 과연 그르니에는 멜빌과 마찬가지로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상으로 그의 여행을 끝내고 있다. 힌두교도들에 대한 말 끝에 그는 그 이름을 알 수도 없으며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항구, 영원히 이르지 못하며 그 나름대로 삶의 발자취란 없는 어떤 다른 섬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여기서도 역시, 전통적인 종교들 밖에서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조심스럽게 암시적인 접근 방식이 아마도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을 향한 유일한 인도 방식이 되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 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었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준 뒤에는 다 비워 내는 신들이었다. 오직 그들과 더불어 있을 경우에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어느 날 그 무례한 마음을 벗기고 나의 이 자연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르니에에게서 얻은 것은 확신들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확신을 줄 수도 주고자 원하지도 않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에게서 의혹을 얻었다. 그 의혹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나로 하여금 오늘날 흔히 쓰는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가 다시 말해서 근시안적인 확신들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준 힘이 되었다. [섬] 속을 뚫고 지나가는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영혼의 의혹은 하여튼 나의 경탄을 자아냈고 나는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제의 저녁 속을 걸어가면서 되풀이 읽어보노라면 나를 마치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주던 저 일종의 음악같은 말들이다. 나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하였고, 우리 도시의 높은 언덕배기에서 내가 수없이 끼고 돌던 높은 담장들에 둘러싸인 채 그 너머로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동꽃 향기만을 건네주던, 가난한 나의 꿈이었던 저 은밀한 정원들 중 하나가 마침내 내게로 열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과연 비길 데 없이 풍성한 정원이 열리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나의 독서, 어떤 짤막한 대화 한마디만으로도 한 젊은이에게서는 촉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펼쳐놓은 책에서 한 개의 문장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고 한 개의 어휘가 아직도 방 안에서 울리고 있다. 문득 절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버린다. 그와 동시에 벌써 그 완벽한 언어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수줍고 더욱 어색한 하나의 노래가 존재의 어둠 속에서 날개를 푸득거린다.
내가 [섬]을 발견하던 무렵쯤에는 나도 글을 쓰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결심이 된 것은 그 책을 읽고 난 뒤였다. 다른 책들도 이 같은 결심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그 역할을 끝낸 다음에는 나는 그 책들을 잊어버렸다. 그와는 달리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 [섬] 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이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경도하고 스승을 얻고, 그리하여 여러 해 여러 작품들을 통하여 그 스승을 끊임없이 존경할 필요를 느꼈던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적어도 생애에 한 번은 저 열광에 찬 복종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게 아니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지식인 사회가 자랑하여 마지않는 어정쩡한 진리들 중에는 저마다 다른 삶의 죽음을 원하는 저 흥분의 진리도 섞여 있다. 그 사회에서는 곧 우리들 자신 모두가 스승이요 노예가 되어 서로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말은 다른 뜻도 지니고 있다. 그 의미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는 오직 존경과 감사의 관계 속에 서로 마주 대하게 된다. 이럴 경우의 생애를 가득 채워줄 수 있는 대화인 것이다. 이 오랜 기간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시킨다.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고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 - 실제에 있어서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것을 얻어 가지기만 하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을 그 어느 것에도 보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 스승은 흐뭇해한다. 이와 같이 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정신이 정신을 낳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는 다행스럽게도 증오 못지 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도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르니에라면 이러한 어조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한 마리 고양이의 죽음, 어떤 백정의 병, 꽃의 향기, 지나가는 시간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여기서는 어떤 비길 데 없는 힘과 섬세함으로 암시되어 있다. 정확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저 가벼운 언어는 음악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굳이 비교를 하려면 프랑스어로부터 새로운 악센트를 이끌어낸 바 있는 샤토브리앙과 바레스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교해 보아 무엇하랴! 하지만 그르니에의 독창성은 그런 비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우리들에게 단순하고 친숙한 경험들을 눈에 드러날 만큼 꾸미는일이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둔다. 단지 이런 조건에서만 예술은 남을 강요하지 않는 천부의 재능이다. 이 책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것을 얻은 나로서는 이 천부의 재능이 지닌 폭을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그 혜택을 입고 있는지를 인정한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상의 양식]이 감동시킬 대중을 발견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이제는 새로운 독자들이 이 책을 찾아올 때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