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낭독 바느질

이춘아 2020. 3. 14. 07:21

 

2020. 3.14(토)

 

아주 오랫만에 심쿵한 글을 만났다. 제주가 자랑하는 김영갑 갤러리. 그 갤러리를 제주에 선물로 주고 떠난 김영갑. 그가 작고하기 전해에 출간된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이 책을 읽고서야 김영갑 갤러리와 그의 사진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가서 확인하고 싶다. 

 

 

김영갑 사진.글, [그 섬에 내가 있었네], human & books, 2004

 

 

<울적한 날에는 바느질을>

 

 

아침저녁 카메라 가방을 메고 놀이삼아 자연 속을 거닌 후 나머지 시간은 한가롭게 지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늘 혼자다. 난 누구도 내 집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형제들이 섬에 내려와도 집만은 보여주지 않았다. 뭍에서 친구들이나 손님들이 찾아오면 한겨울에도 밖에서 만나 차를 대접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늘 궁금해했다. 

 

“서울에서 큰맘 먹고 일부러 왔는데 추운 날씨에 밖에서 커피를 마시라니.. 빨리 꺼지라는 거냐 뭐냐? 아니면 방 안에 젊은 여자라도 숨겨놓은 거냐?”

 

“정리하지 않아 난장판이다.”

 

“혼자 사는 사내 살림살이야 안 봐도 뻔한데, 뭐 숨길 거라도 있어?”

 

“다음에 보여줄게.”

 

“촌구석에 처박혀 지내려면 지겹지?”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도 바쁘다.”

 

“뭐하며 지내는지 자세히 얘기 좀 해봐라.”

 

“아침저녁 작업하고, 밥해 먹고, 빨래하고 잠자고 그런 거지 뭐.”

 

“한 두 해도 아니고 벌써 십 년째인데 이젠 떠나야지?”

 

“아직은 재미있어.”

 

“재미있으면 문제가 있는 거다. 썩고 있다는 징조다. 강산이 한 번 변했으니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야지. 십 년 이상 한 군데 머물면 안주하게 돼 있어. 예술가는 안주하면 치명적이지.”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이제야 뭔가 감이 잡혀.”

 

“일이 년 떠났다가 다시 시작하는 게 현명할 텐데.”

 

“아니야. 그동안은 정신 못 차리고 갈팡질팡했어. 이제야 진짜 사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나만의 화두를 발견했어. 느낄 수 있으나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표현할 거다.”

 

“긴 시간 혼자 궁색하게 지내면 성격 버린다. 서울로 올라와 돈벌이도 좀 하지?”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이 혼자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으면 특별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늘 바쁘게 생활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사진 찍고 현상하고 인화하고.... 반복되는 생활이 지겨워지면 액자 만들고, 액자를 걸어 전시할 수 있는 조형물을 만들고, 그것마저 싫증 나면 광목에다 감물을 들여서 제주 사람들이 입는 갈옷을 만든다. 7월이나 8월쯤 풋감을 따다가 짓이긴 것에 옷감을 넣고 주물러 감물이 천에 스며들게 한 다음, 이슬을 맞히고 햇볕에 바래게 하면 적갈색의 뻣뻣한 갈옷이 만들어진다. 갈옷은 땀에 젖지 않고, 흙이 묻어도 쉽게 털어지니 빨래를 하기도 좋다. 무엇보다 내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가롭게 생활하다 보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쉬워 늘 무엇인가에 빠져 들게 된다. 결과 없는 작업에 매달려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짐을 챙겨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울적할 때면, 몸을 바삐 움직여 금방 결과가 나타나는 흥미 있는 일을 찾는다.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을 하는데, 그중에 바느질은 몇 년 동안 나의 흥미를 끌었다. 바느질은 특별히 돈이 드는 일도 아니어서 나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작고 하찮은 것은 버리기가 쉽다. 흩어진 천조각들을 모아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바느질한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상큼해진다. 예쁜 조끼나 저고리 등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든다. 그리고 감물로 염색을 한다. 완성된 옷을 입고 다닐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그 가슴 설렘을 기대하면  밤을 새워 바느질을 한다. 잠자리에 누워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면 일어나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한다. 평소에 눈에 띄는 대로 헝겊 조각들을 모아둔다. 그 조각들을 빨고 다듬어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전체가 조화를 이루도록 깁고 감쳐서 조각보를 만든다. 그 조각보를 재단해서 어느 한 조각 모나지 않게 정성들여 바느질을 하면 옷이 된다. 그러면 온갖 시름이 사라진다. 창에 걸어둔 커튼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이불보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바느질에 열중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바느질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한번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누추한 내 움막집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 출연하지 않겠다고 하자 담당 프로듀서는 거절하지 못할 친구를 내세워 출연을 강요했다. 프로그램 성격상 나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 뻔했다. 가족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궁색한 살림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살림살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출연에 응했다. 약속대로 밖에서만 촬영을 했다. 촬영을 끝내고 담당 프로듀서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커튼을 직접 만든 겁니까?”

 

“심심해서 만들곤 해요.”

 

“바느질도 염색도 직접 하신 거예요?”

 

“시간 때우려고...”

 

프로듀서가 창문에 쳐져 있는 커튼을 찍겠다고 사정을 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 방 안의 커튼을 찍고 나면, 다음엔 암실에 카메라를 들어딜 것이 뻔했다. 그들은 사진가라면 카메라와 장비와 암실을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입장을 들먹이며 양해를 구했고, 결국 밖에서 바느질하는 모습을 찍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보았다. 

 

믿음과 오기로 시작한 섬 생활이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다 보니 궁핍의 연속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산간 마을에서 생활하다 보니 따로 방세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정한 수입이 없으니 어쩌다 돈이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필름과 인화지를 구입했다. 오로지 사진에만 매달려 사는데 해가 바뀔수록 카메라는 작동이 안 돼 마음을 졸이게 하고, 확대기는 낡아 말썽을 부렸다. 변변찮은 작업실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지냈다. 필름과 인화지는 늘 부족해서 애간장을 태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곰팡이 피어가는 필름만이 캐비닛에 가득했다. 

 

일에 몰두하면 잘 지내다가도 어느 한순간 방심하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생활 대책도 없이 의지 하나로 물고 늘어지다 보니 여러 문제가 얽히고 설킨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몸으로 부딪쳐나가야 한다. 그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나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지금 이 길이 정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에 매달리다 보면 또다시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이럴 때는 도회지의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다. 그런데도 눌러앉아 여기까지 흘러왔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 이 길을 포기하고 다른 무엇을 선택한다 해도 그 나름의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다른 일을 선택해 환경이 변한다 해도, 나는 나이기에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의 혼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나 방황하고 절망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하기 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분명 끝은 있을 것이다. 

 

사진에만 매달리다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나를 이해해주던 사람들과도 멀어져갔다. 그래도 바느질에 열중하다보면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야 할 때는 바느질감부터 찾는다. 울적한 날에는 바느질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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