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어 옮김), 돌베개, 2005.
(1919년 3월) 안동현을 떠난 지 4일 후, 나는 무사히 상해 포동 부둣가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에서 얼음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상해의 불란서 조계지에는 가로수에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안동현에서는 추위로 고생을 하였는데, 상해에서는 등과 얼굴에 땀이 났다.
일행과 같이 동포의 집에서 방바닥에 담요만 깔고 잠을 자고, 다음날부터 황해도의 김보연군이 찾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 김군의 안내로 밤낮 그리던 이동녕 선생을 찾아갔다. 1910년 양기탁의 사랑방에서 뵈었던 모습에 비하면, 근 10년 동안 고생을 많이 겪으신 탓인지 팽팽했던 얼굴에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서로 악수하고 나니 감개무량하여 할 말을 잊었다.
당시 상해에 있던 한인은 500여 명 가량 되었다. 장사치와 유학생 약간, 10명 남짓한 전차회사 검표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 일본 미주 중국 러시아 등에서 모여든 지사들이었다. 1919년 당시 본국에서는 대도시는 물론이고 외진 항구나 시골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해외 한인들도 어디서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상해에 모여든 청년들을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져서, 각 곳에서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이승만을 총리로 임명하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법무 교통 등의 부서가 조직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미주에서 상해로 날아와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고, 각 부 총장은 멀리서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차장들을 대리로 세워 국무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동휘 등이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왔고, 이시영 등은 북경에서 왔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업무가 실마리를 잡아 가기 시작할 무렵, 한성에서는 비밀리에 각 도 대표가 모여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정부를 조직하였다. 미리 의논하지 않았는데도 상해와 본국에 두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정부가 활동하기가 어려워 그 권한을 상해로 보내, 이에 두 정부를 통합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명하고, 1919년 4월 11일 헌법을 반포하였다. 이런 내용은 독립운동사와 임시정부 회의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나에 대한 이야기만 기록한다.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 선생께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시켜 달라고 부탁하자, 도산은 내가 벼슬을 시켜 주지 않는 데 대한 반감으로 그러는가 염려하는 빛이었다. 나는 일찍이 본국에서 교육사업 할 때 집에서 혼자 순사 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는 것,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할 때 후일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기로 결심하여 나의 호를 ‘백범’으로 고쳤다는 것 등을 예로 들며, 평소 진정한 나의 소원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도산은 흔쾌히 승낙하고, “다음 날 국무회의 때 제의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도산은 뜻밖에도 경무국장 임명장을 주었다. 나는 “순사 자격에도 못 미치는 자가 경무국장의 직책을 감당할 수 없다” 며 사양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계속 거절하면 젊은 차장들의 부하 노릇하기 싫다고 받아들일 터이니, 사양하지 마시오”라며 강권하였다. 그때 임시 정부의 차장들이 젊은 청년들이었으므로, 연장자에게 문을 여닫게 하고 다니기가 미안하다 하고, 또한 백범이 여러 해 감옥 생활로 왜놈들의 실정을 잘 알터이니 경무국장이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나는 경무국장으로서 신문관 검사 판사뿐만 아니라 형 집행까지 맡아 하였다. 남의 조계지에 붙어사는 형편이었으므로, 임시정부의 경무국 사무는 다른 나라의 경찰 행정과 달랐다. 주된 임무는 일본의 정탐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적의 마수가 어느 쪽으로 침입하는지 살피는 일이었다. 나는 정복과 사복 경호원 20여 명을 임명하여 이 일을 수행하였다.
홍구의 일본 영사관과 우리 경무국이 서로 대립하고 암투하였는데, 당시 불란서 조계당국은 우리 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해 특별히 동정적이었다. 일본 영사가 독립운동자의 체포를 요구하면, 불란서 당국은 이 사실을 미리 알려 준 다음 일본 경관을 데리고 와서 빈집만 수색하고 가곤 했다.
한번은(1922년 3월) 황포 부둣가에서 오성륜 등이 왜구(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에게 폭탄을 던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폭탄이 터지지 않아 다시 권총을 쏘는 바람에 미국 여자 한 명이 죽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일 영 불 세 나라가 함께 불란서 조계지의 한인을 대거 수색하고 체포하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왜경 7명이 불란서 경관을 대동하고 노기등등하여 침실을 침입하였다. 그런데 그 불란서 경관이 나와 친한 사이였다. 그는 일본말을 몰랐으므로 체포장에 있는 이름이 김구인지 모르고 단순히 한인 강도인 줄로만 알고 체포하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잘 아는 친구가 아닌가. 왜놈들이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려 하자, 불란서 경관이 말리며 나에게 어서 옷을 입고 불란서 경무국으로 가자고 했다.
그의 말대로 숭산로의 불란서 경찰서로 갔더니, 원세훈 등 5명이 먼저 잡혀와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왜경이 와서 나를 신문하려 하였지만, 불란서 경관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영사가 나를 데려가겠다고 해도 듣지 않았다. 도리어 “김군이 체포된 5명을 담보하고 데려가기를 원하는가?”라고 묻고, “원한다”고 하자 즉시 그들을 풀어 주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불란서 경찰국에서 한인 범죄자들을 체포할 때마다 배심관으로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란서 경무국에서는 나를 잡아가게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보증만 하면 현행범 말고는 즉시 풀어 주었다. 이런 관계를 안 뒤부터 일본은 나를 체포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정탐꾼을 시켜 영국 조계나 중국 지역으로 유인하여 나를 잡아가려 했다. 그때부터 나는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1921년 1월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대회는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 등 각 곳에서 온 다양한 계파의 한인단체 대표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중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상해파 공산당이 서로 경쟁적으로 민족주의 대표들을 분열시키려 했다. 이르쿠츠크파는 현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 정부를 만들자는 ‘창조파’이고, 상해파는 현 임시정부를 고치자는‘개조파’였다.
결국 국민대표대회는 깨어지고, 창조파는 임시정부와 별도의 ‘한국정부’를 조직하였다. 김규식이 이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지만, 러시아가 허용하지 않으므로 무산되고 말았다. 회의에서 공산당 두 파가 서로 싸움을 벌이니,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 혹은 개조를 주장하며 사태가 시끄럽게 되었다. 1923년 6월 내가 임시정부 내무총장의 직권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발표하니 비로소 시국이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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