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1920년대 상해" (7)

이춘아 2020. 7. 4. 03:59

2020.7.4(토)

“1920년대 상해”(7)

이흥기, [신채호&함석헌/ 역사의 길, 민족의 길], 김영사, 2013.


북경에서 신채호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에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서명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고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만세 운동을 보면서 ‘민중'의 힘을 느끼고 상해로 옮겨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 정부 수립에 나섰다.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는 초기 단계부터 주축으로 참여한 신채호는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를 이승만으로 하자는 안에 결사반대하고 자신은 무장 투쟁론자 박용만을 후보로 천거했다. 이승만이 그해 2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한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하는 안이 통과되고, 이에 격분을 참지 못한 신채호는 회의장에서 퇴장한 뒤 그해 중반까지 임시 의정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9월 상해와 러시아, 그리고 한성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단일 정부의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자 본격적으로 반임정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뜻을 같이하는 신규식, 남형우의 지원을 받아 상해에서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해 임시 정부를 비판하여 같은 해 8월에 창간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과는 지상논쟁을 벌이는 한편, 신대한동맹단(단주 남형우)의 부단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신대한]이 임시 정부의 압력으로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 되자 신채호는 1920년 4월 다시 북경으로 옮겼다. 바로 박용만 등 반임시 정부 인사들과 함께 ‘제2회 보합단’을 만들고 그 내임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 투쟁 조직인 보합단을 계승하는 ‘대한민국 군정부’를 자칭하며 임시 정부의 노선을 비판했다. 같은 해 9월에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단체로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 해는 해외 망명 중인 신채호에게 거의 유일하게 활력이 넘치는 시기였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총독부의원 간호사로 일하다가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대학교에 다니던 28세의 박자혜와 재혼한 것이다.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눈앞에 둔 1922년 12월 신채호는 김원봉의 초대로 상해에 갔다. 김원봉은 신채호의 반이승만 성토문에도 서명한 인물로, 그가 이끄는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창설된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 단체로 암살, 파괴, 폭동을 그 방법으로 택했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비판에 직면하여 노선과 방법을 이론화, 합리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김원봉이 의열단 선언문을 신채호에게 의뢰할 때 의열단 쪽 이론가로 나선 이가 바로 아나키스트 유자명이었다.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 출신으로 3.1운동 참가 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교의 리스청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된 인물로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도 참여하고 1921년에 의열단에 가입했다. 

신채호가 1923년 1월에 집필한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 선언>은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고 여타의 독립운동 방략, 국내에서 일어난 자치론, 내정 독립론, 참정권론은 물론 상해 임시 정부가 주창한 외교론과 독립 전쟁 준비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선언문은 민족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독립과 함께 아나코-코뮤니즘의 주된 방략인 테러적 직접 행동론을 주창함으로써 민족주의와 함께 아나키즘적 성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23년 1월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불신임을 가결시켰지만 상해임시 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재조’하는 데 그칠지 아니면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임시 정부를 ‘창조’할지를 두고 강경한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임시 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세워 무장 투쟁 중심의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려는 꿈을 꾸었다. 창조파 단독으로 1923년 6월 ‘조선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입법부와 행정부를 새로 만들자 상해 임시 정부에서 이를 부인하고 창조파를 규탄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규식을 행정 수반으로 하고 윤해를 의장으로, 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문창범 등을 고문으로 한 창조파의 ‘임시 정부’는 1923년 8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으나 대일 외교를 중시한 소련 정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실의에 빠진 신채호는 1924년 초 잠시 승려가 되어 북경 교외의 관음사에 들어갔다. 승려 생활 중 역사 연구에 정열을 태우기 시작해 6개월 만에 하산했다. 1924년 가을에서 1925년 말까지 신채호는 그동안  축적한 연구를 바탕으로 북경대학교 등지에 소장된 사료를 섭렵하며 본격적인 한국사 연구에 몰두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1924년에는 [조선상고사]의 총론을 저술했으며 서울에 보냈던 처자의 생계를 위해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편집을 각각 맡고 있던 친우 홍명희와 한기악 등을 통해 한국사 관련 글을 기고했다. 

1930년 5월 수감된 뒤 국내의 지인들은 그의 한국사 연구 성과를 간행하거나 신문 지상에 실어 대중에 널리 알리는 일에 착수했다. 홍명희 등은 신채호가 1924~1925년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한국사 관련 기고를 모아 [조산사연구초]라는 이름으로 1930년 6월 간행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신채호가 천진의 박용태에게 맡겨둔 원고를 받아서 [조선일보]에 [조선사](1931.6~1931.10)와 [조선상고문화사](1931.10~1931.12, 1932.5)를 연이어 게재했다. 워낙 병약한 데다가 여순 형무소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서 그의 건강은 심히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쓰러진 뒤 3일 만인 21일 여순형무소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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