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어 옮김), 돌베개, 2005.
민국 2년(1920, 45세), 아내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왔다. 어머님은 내가 중국에 온 뒤에도 장모와 같이 황해도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가 세상을 떠나자 민국 4년(1922, 47세) 상해로 건너와 오랜만에 함께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 둘째 신이가 태어났다.
상해에서 함께 가정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민국 6년(1924) 1월 1일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둘째 신을 낳은 후, 몸도 채 튼튼치 못한데 2층에서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층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 고생하다 상해 보륭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서양 의료시설을 갖춘 홍구 폐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불란서 조계지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륭의원에서 아내와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김의한 부처(김의한, 정정화)가 병원에 들러 아내의 임종을 봐주었고, 나는 그들이 전해 주는 말만 들었다. 나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 지역인 숭산로 경찰서 뒤 공동묘지에 묻었다.
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 혼례나 장례 등 의식으로 돈을 낭비하는 것에 찬성치 않았다. 그래서 아내의 장례도 검소하게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동지들은 아내가 나로 인해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랏일에 공헌한 것이라며, 각기 돈을 거두어 장의를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아내가 입원했을 때 인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에 입원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당시 신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히고 젖을 먹을 때였다. 아내가 없자 어머님은 신이를 우유로 기르셨는데, 밤에는 당신의 빈 젖을 물려 재우셨다. 신이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님이 무엇인지 몰랐다.
상해에서 우리는 극도로 어렵게 살았다. 그때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들과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에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시고는, 매일 밤 먹을 만한 것만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만들어 놓으셨다.
상해에서 살기가 더욱 어려워지자, 민국 7년(1925, 50세) 어머님은 네 살이 채 안 된 신이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큰아이 인이를 데리고 여반로 단층집을 세내어, 이동녕 선생 및 몇몇 동지들과 함께 살았다. 그때 어머님이 담가 주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1925년 11월 귀국하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하였으므로, 어머님은 인천에 상륙하시자 바로 여비가 떨어졌다. 어머님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자, 지국에서는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 드렸다.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사리원까지 보내 드렸다.
고국에서도 어머님은 밤낮 상해에 있는 자손을 잊지 못하시고 생활비를 아껴 적은 금액이라도 보내셨다. 그러나 그것은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처럼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내 사정을 알아채신 어머님께서 민국 9년(1927, 52세) 다시 인이까지 본국으로 보내라고 명하셨다. 인이까지 귀국시키니, 상해에서 나는 다시 혈혈단신으로 한 점 딸린 식구도 없게 되었다.
1925년 8월 29일 나석주(1892~1926)가 식전에 고기와 채소를 많이 사 가지고 와서 어머님께 드렸다.
“오늘이 선생님 생신이 아닙니까? 돈도 없고 해서 옷을 전당잡혀 고기 근이나 좀 사 가지고 밥해 먹으러 왔습니다.”
나는 나석주에게 그처럼 영광스럽게 대접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하고, 그간 생신을 차려 드리지 못한 어머님께도 너무나 죄송하여, 죽는 날까지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내 일생에서 제일 큰 행복은 기질이 튼튼하게 태어난 것이다. 7년 가까이 감옥 고역을 하면서도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이 없으니, 단지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에 간 적은 고국에서 혹을 떼러 제중원에 갔던 1개월, 그리고 상해에 온 뒤 감기에 걸려 치료한 것뿐이다.
기미년에 중국으로 건너온 후 벌써 10여 년, 그간 지나온 일 중에 중요하고 놀라운 것도 많으나, 독립 전까지 절대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너희에게 일일이 알려 주지 못하는 것이 극히 유감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년(1929, 54세) 5월 3일에 마쳤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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