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잘 가시라

이춘아 2020. 7. 11. 00:08

2020.7.10(금)

새벽 4시경 잠에서 깼다. 핸드폰을 켜서 뉴스를 찾아본다. 박원순 시장님이 결국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막연함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사실인지, 잘못된 뭐가 있는 건 아닌지 하면서도 사실에 가까움을 인정해야하는 뻐근함이 가슴 뭉치로 내려앉는다. 

노희찬도 박원순도 1956년생. 왜 그들은 죽음을 급하게 택했을까. 그들이 그토록 가열차게 살아왔던 그 많은 에너지는 어디로 빠져나가고 죽음을 서둘러 택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들의 판도라 상자에 남겨둔 마지막의 것은 수치심이었을까. 우리의 문화권. 도덕적 형벌은 개인에게 너무도 큰 무게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에게 파생된 것은 병에 걸리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나의 동선이 밝혀지고 사람들에게 들려질 말과 글이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둘러싸여 살고 있는 보호장치가 막상 일이 터지면 나에게로 집중되어 쏟아질 허공을 맴돌 말 말 말 들이다. 그것은 공포에 가깝다. 손가락질 비난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모든 것을 한번에 잠재울 단 하나의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한밤중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하늘의 소리같다. 잘 가시라. 우리들은 그대가 살아왔던 희망을 놓치지 않고 희망을 계속 만들어가며 이어가도록 하겠다. 

희망제작소. 아마도 당신의 운명이 권력의 정점에서 얼룩지기 보다는 희망으로 남겨놓는 것으로서 소명을 다하는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당신이 그것을 택했다면 당신은 권력의 정점에 가기 싫어서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잘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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