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그 마음이 여성들을 움직였다

이춘아 2020. 10. 4. 17:59

이효재 선생님이 2020.10.4 돌아가셨다.
19년전 진해로 찾아가서 인터뷰했다.
이 글은 서울시 북부여성발전센터, [여성, 삶의 이야기 10인전] (2001)에 실렸다.


이효재 가족사회학자, 여성단체 대표
사회학적 관심이 닿는 곳에 마음이 열렸고 그 마음이 여성들을 움직였다

2001년 인터뷰. 이춘아
 
 
“선생님은 제 삶의 거울이세요”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제자는 행복하다.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펼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스승은 자랑스러워한다. 그러한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스스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학문과 실천의 장을 자유롭게 자신의 뜻에 따라 넘나들어 온 삶이 어느새 희수를 넘기고 있는 이효재 선생. 어려서 막연하게나마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이 민족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왔던 그의 발자취를 이어나가면 최근 몇십년간 한국여성운동의 방향이 보인다.
 
이 사회의 불우한 여성을 위해
 
스승 이효재로부터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닮고자 했던 학생들이 이제는 여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되었다. 한국 사회와 여성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학자로서 고민하고 연구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올곧은 모습에서 빛을 본 제자들 역시 그 길을 따라 나아갔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꺼이 성금을 거두어 연구소를 마련해 드렸다. 세상의 외풍이 무서웠던 80년대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에 마련된 연구소는 여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게 되는 산실이 되었다. 이화여대에 복직한 후 6여 년이 지나 은퇴식 겸 출판기념회에 제자들은 다시 모였다. 은퇴 후 제자들은 스승을 고향으로 내려 보내지 않았고 여성운동단체의 대표자로 모시고 기반을 다져나가는데 앞장서게 했다.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부분 가운데 혹시 분노는 없었는지 라는 물음에 단 한번 분노가 있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의 노예로 끌려간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을 때였다. 평소 가깝게 지내고 있던 윤정옥 선생이 정신대할머니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선생 자신 역시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부모님이 빨리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바로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이 오늘날 그렇게 비참하게 피폐화되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다음날부터 선생의 활동반경은 뉴욕으로 비엔나로, 그리고 아시아 정신대여성들의 만남을 위해 일본으로 북한으로 동분서주했던 열정적 삶이었다.
 
할머니들을 위한, 할머니들에 의한, 할머니들이 벌이는 문제제기는 곧장 여성계의 비상한 관심이 되었고 아시아 여성들과 남북의 여성들을 묶어내고 세계여성들의 인권문제로 확대되어 국제적 주요 쟁점이 되었다. 70대 노스승의 삶을 지켜보며 이제껏 함께 해온 후학들은 스승의 삶의 이어가고자 하였고 또다시 후배들이 스승의 뜻을 이어가길 바랄 것이다.
 
선생이 현재까지 집필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져 나온 것만도 십여권이 넘는다. 글들이 읽기 쉽다. 오랜 유학생활을 했지만 원론적이고 개념중심적인 단어의 번역문투가 전혀 없다. 차근차근 이야기해주는 듯한 문체로 사회현상을 조근조근 설명하고 왜 이렇게 되어나가는지 해결방안은 어떤 것인지 다져나간다. 인터뷰를 위해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었다. 글쓰기는 이렇게 되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선생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는가 하고. 바른 답을 주셨다. 글을 쓰기 전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으면 절대로 써지지 않았다고. 내 마음이 움직여야만 써지는 글이었기에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독자들까지도.
 
1997년 서울에서의 삶을 마무리 짓고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진해로 내려와 7년전 은퇴할 당시 계획했던 연구를 선생은 그제서야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가족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이효재 소장(77세)이 건내주는 명함이 소박하다. 복사지에 프린트하여 가위로 오려서 만든 명함에는 '서울시 여성한국사회연구소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경신재단 경신사회복지연구소 소장 이.이효재' 라고 되어 있다. 몇 해 전 여성계가 추진하고 있는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 동참한 이후로 반드시 이.이효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3대째 기독교 가정이었던 집안으로 아버님은 이약신 목사님이었고 어머니 이옥경은 사회사업가이셨다.
 
1924년 마산에서 태어난 이효재는 목회자인 부모님을 찾아오는 어려운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왔다. 특히 재취나 소실로서 아픔을 지닌 여성들이 어머니를 찾아와 하소연하는 모습들에 가슴 아파했고, 목사이신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온 가족이 만주로 피신해야만했던 음울했던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서러움 속에서 자랐다.
 
부산에서 아버지가 목회를 하셔서 초등학교 과정은 부산의 동래일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중등학교 과정은 아버지의 친구분이 교무주임으로 계셨던 원산 루시여학교를 다녔다. 졸업하고 난후 대동아전쟁으로 근로정신대 모집이 있게 되자 부모님은 딸을 혼인시키고자 맞선까지 보게하고 약혼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19세의 이효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이 사회의 불우한 여성들을 위해 일해보리라 막연하게나마 마음먹었던 꿈을 기억해 냈다. 그 당시 앞날의 삶이 혼인을 하게 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고향인 마산으로 도망쳐왔다.
 
한국사회를 구할 수 있는 학문을 찾아서
 
마산에서 잠시 직장을 다니던 중 해방이 되면서 그는 이화여대 문과에 입학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가 뜻밖에 미국 유학을 하게 된다. 미군정 시절 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냈던 문정담당장교였던 알라바마대학의 교수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음대를 다니고 있던 여동생과 함께 유학할 수 있는 초청장을 보내어 1947년 여동생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알라바마 대학, 유니언신학대학(리치몬드, 버지니아), 콜롬비아 대학에서 사회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58년, 9년만에 귀국을 하여 이화여대 사회학과의 교수가 된다.
 
사회학을 전공한 교수로 자리잡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처음부터 사회학을 하겠다고 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한국사회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상적 틀을 구하고자 하였던 생각으로 우선은 사회사상을 다룰 수 있는 철학을 하고자 하였으나 아메리칸 드림과 승전국으로서 원더풀과 비유티풀을 구가하는 미국사회는 학문적으로도 고뇌하는 지식인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철학을 전공하고 싶어하는 이효재 학생에게 오히려 학교담당자는 가정학과를 권유했다. 학교안내서를 보니 사회학과 라는 곳에 사회사상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그렇게해서 사회학과에 들어가게 된다.
 
1940년대와 50년대의 미국 역시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가난한 동양에서 온 여학생은 한국 상황에 적합한 사회사상을 찾고 있었으나 미국사회학계는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조사방법을 추구하는데 머무르고 있었다. 그다지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조사 방법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런대로 재미는 있었다. 중남미의 유카탄 지역에 아시아 원주민의 문화가 남아있었다는 연구에 접하면서 문화의 상대성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보수적인 틀을 변화시켜갔다. 여전히 미국식 사회학에 흥미없기는 마찬가지였고 2년간 폐병을 앓아 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자신의 고민을 학교교회 목사님께 상담을 드렸더니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남장로교파 유니온 신학교에 가면 신학공부도 하고 종교교육을 받을 수 있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2년간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곳에서 인간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신의 계시도 진보적으로 증대되어간다는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신학교수를 만나면서 이제까지 지녀왔던 보수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학과 종교교육만으로 한국 상황에 적용할 수 없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역사발전에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게 되니 사회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도 생겨났다. 그래서 다시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머튼, 킹슬리 데이비스, 라자르스펠트 등의 당대 유명한 구조기능주의 사회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논리적 이론의 틀을 세워 그 틀에 따라 사회현상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사회를 민주화시키고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사회현실을 분석하고 실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 분야였기에 한국에 나가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주변에서 말렸으나 9년 넘게 외국생활을 했었고 빨리 돌아가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올랐다. 사회학을 배웠으니 사회민주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과 의식의 변화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비록 동족상잔으로 남북이 나뉘었지만 남쪽만이라도 민주사회를 이룩해서 자주성을 획득한다면 민주통일사회를 이룩할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화의 개념이 단순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져야 민주화가 된다는 근대화론의 입장에 있었다.
 
 
도시 중산층 여성에 대한 관심이 가족 연구로
 
1957년 봄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서울의 종로바닥은 폐허였고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유학당시 폐병을 앓아 미국의 요양원에 누워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한국전쟁의 참상이 되살아났다. 처절하게 가난한 나라였다. 한국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마치 서양선교사가 남의 나라 땅을 밟은 그런 기분이었다.
 
사회학과 교수로서 도시중산층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에서 보았던 교회를 중심으로 한 백인중산층 여성들이 지역사회의 주축이 되어 봉사활동과 사회참여를 하던 것을 인상 깊게 보아왔던 터였다. 미국식의 가치관으로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두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문제 연구를 하게 됐다.
 
전쟁 이후 경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이북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서울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사회변화과정에서 도시가족,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면 가족이 핵가족화 되어 부부 중심으로 된다는 근대화 이론에 입각해서였다. 그래서 도시가족 연구를 시작했고 1959년부터는 농촌가족 연구를 했다. 농촌가정의 여성은 좀더 전통적이지 않겠느냐는 근대화이론의 잣대로 시작했다. 농촌으로 사회조사를 다니면서 재미있었다. 이화여대생과 서울대생들이 합동으로 조사하니 학생들도 재미있어 했다. 당시 여학생들 대부분이 학문이나 직업에 뚜렷한 관심이 있어서 대학을 오는 것이 아니어서 사회학과 학생이라 하더라도 민주화, 사회연구, 근대화, 사회심리학 등 심각한 것에 별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졸업해서 혼인하느냐는 관심밖에 없었다. 학생들의 태도가 답답하기는 했지만 선생은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결혼후 어떤 삶을 사는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대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교육내용으로 삼아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중산층 가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정치적인 문제로 사회가 혼란했고 사회적으로도 도시화로 인한 산업노동자 문제와 빈민 문제가 심각해지는 현실에서 학교에서 가족연구나 하고 미국사회학이나 가르치고 있었으니 불만스러웠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 더구나 여학생들을 상대로 한 사회학 교육이라는 것이 아이들도 지겹고 자신에게도 메아리 없는 가르침이었다. 미국에서 배웠던 이론과 사상으로는 도저히 우리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고민에 싸였다.
 
고민 끝에 동양사회가 서구화 과정, 근대화 과정에서 겪는 문제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와 이론이 필요할 것 같아 찾아보니 미국 버클리대학에 중국사회를 연구하는 독일 출신 교수가 있어 다시 유학을 갔다. 그 해가 1962년이었는데 버클리대학 사회학과에는 스멜스, 데이비스 등 하버드와 콜럼비아 대학에 있던 구조기능주의 사회학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일반 교수들은 아카데미즘에 빠져서 미세하고 세밀하게 분석해 들어가는 보수적 입장이어서 학생들은 현실에 맞지 않는 수업으로 인해 불만으로 가득했다. 바로 그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고민 중에 이스라엘에서 유학 온 한 학생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새로운 사회실험과 민족통합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 이스라엘이 새로이 민족국가를 창설하고 있었으니 막연히 바라고 그리던 새로운 사회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박사학위과정을 접어둔 채 서울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에 갈 기회를 알아보았더니 한국의 농협과 노총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의 발전과정으로 교육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신청하여 1966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방문의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국가를 재창조하고 민족을 통합시키고 사회경제조직으로 농촌에는 협동적인 공동체로, 도시에는 생산조직인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이 협력해서 사회경제적인 민주화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는 감동적이었다. 3개월간의 교육과정만으로도 막연히 생각해왔던 사회의 민주화와 변혁에 기여하는 사회프로그램, 사회조직, 새로운 경제조직을 형성하는 문제, 그리고 남녀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회의 구성 등이 유토피아가 아니고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스라엘을 다녀온 후 여성연구를 좀더 자신 있게 할 수 있었고 미래지향적이고 개혁적인 사회조직 방안을 생각한 끝에 1970년 이화여대에 여성자원개발연구소를 만들어 화곡동 중산층 문화주택지역을 중심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소비자협동조합 전단계로서 공동구매라든지 협동보육원에 대한 얘기, 놀이터 공동관리, 지역발전을 위한 교육에의 관심과 참여 등등 외국에서 본 대로 시민으로서 여성의 참여를 염두에 두고 지역사회에 실험한 것인데 한 2년 정도 진행했을 무렵 10월 유신이 났고 사회가 폭압적인 분위기로 바뀌는 바람에 결국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당시 발간한 소책자의 제목이 [여성은 지역사회의 주인이다 -지역사회 발전과 여성의 역할]. 이제와서는 고전적인 부제가 되었지만 여성운동에 있어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 되고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본 분단 문제
 
그 당시 미국 사회학계에 흑인사회학이 대두했다. 50년대 처음 유학시절에는 흑인문제에 전혀 관심도 이해도 없었는데 흑인들이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는 그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가장 오래된 흑인대학인 피스크대학에 교환교수를 자청해서 갔다. 흑인사회학은 인종해방을 위한 사회학이라는 과감한 주장에 의식의 전환을 갖게 됐다. 그 전까지는 재생산적인 측면에서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과 공동체적인 사회개혁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흑인사회학을 알고 나서부터는 민족해방, 민족통일에 기여하는 사회학도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하였고 한국의 분단과 사회학을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얻었다. 여성의 입장에서 분단가족의 문제를 보게 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1970년대는 국내외적으로 여성해방운동이 고조된 시기였다. 특히 국내에서는 이농해온 젊은 여성들이 산업노동자로서의 성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치열한 노동자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가족법 개정을 요구하는 중류층 여성들이 범여성조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단 안보를 내세우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충효를 강조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기반 위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미화되어 여성들의 요구가 억압당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여성문제, 가족문제를 분단구조를 유지하는 군사정권과 관련지어 이해하게 됐다. 가족연구를 통해 여성의 한이 민족분열과 반공으로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파악하게 됐다. 분단 구조의 성격을 정치군사적 문제로 제기하기에는 어려운 시기였기에 가족문제라는 인간적 차원에서 여성의 한과 민족의 한을 결부시킬 수밖에 없었다.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민족문제가 너무 암담했기에 그러한 문제의식으로나마 우리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우연한 기회로 유엔 멕시코여성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남북여성들이 국제회의에서 대면하게 되는 장면을 보았다. 그 당시 북측 대표단장이었던 허정숙씨가 한복을 입고 나와 당당하게 우리말로 주제발표하는 것을 보고 민족주체성을 느꼈다. 북한대표단의 당당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시위용으로만 나선 격이 되어버린듯한 남한대표단의 당시 상황이 너무 씁쓸하여 통일하기까지는 절대로 국제대회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성대회 참가 시기 내내 회의에 제출된 자료와 신문잡지를 읽으면서 서구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여성학의 흐름을 처음으로 파악하게 된 것은 큰 성과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76년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여성학 설치준비를 시작하였다. 여성학설치를 위한 교과과정의 문제점과 대안을 위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1977년 팀티칭 형태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사회학과에는 여성사회학 강좌가 개설되면서 사회구조적인 시각에서 여성문제를 보기 시작하였다. 사회학과 학생들 중심으로 발족된 새얼회의 지도교수가 되었고, 그 당시 새얼회 회원들과 지금까지 학맥을 같이 하고 있다. 새얼회가 시작한 노동자 운동 지원을 계기로 여성노동자를 위한 여성학 강좌를 시작하였으나 광주사태가 나면서 빨갱이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났다.
 
여성운동의 중심에 서다
 
1980년 대학에서 해직당하자 해직교수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면서 제자들과 현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지은희, 김주숙 씨들이 나서서 선생의 연구실을 마련하고자 나서서 동창들이 돈을 모아, 아현동 굴레방다리에 1984년 3월 ‘여성한국사회연구회’ 사무실을 열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들끼리의 연구회는 없었다. 여성학개론도 같이 공부했다. 1980년 후반부터 젊은 사람들이 여성문제를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연구한다고 나가고 일부는 교육을 통한 실천운동을 해야한다고 나가고 해서 연구회가 분화된 셈이지만 한국사회와 여성문제를 가족의 입장에서 연구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꾸준히 유지되었다.
 
1984년 다시 학교에 복직하면서 [분단시대의 사회학]을 출판하고, 1987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창립되어 초대회장을, 여성노동자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이사와 이사장직도 맡았다. 1990년 정년퇴직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회 회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사회교육원을 창설하는 등 1980년 후반기 이후 선생의 삶은 여성운동단체 대표로 활동하는데 주력하였다.
 
1980년대 권인숙 성고문사건과 1990년 들어와 부각된 정신대 문제가 연결되어 '국가와 여성, 그리고 성'이라는 문제는 선생 개인의 민족적 분노일뿐 아니라 이제까지 돌아본 한국사회의 가장 정점인 주제였다.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세계 여성들의 주요 이슈로 부각시키는 작업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비엔나로 일본으로 북한으로 70대의 노구를 끌고 열정적으로 투신하였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이 이제 체계가 잡히자 모든 활동을 접어두고 가족이 있는 진해로 내려와 선생이 하고 있는 연구는 이조후기 가족사 연구이다. 실학사상이 있었으나 민중과 연결되지 않았고, 동학과 증산교를 중심으로 여성해방사상이 나왔으나 유학자와 사대부 양반계층사회에는 시대적 사상으로 부각되지 못한 데는 신분제사회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 본 것이다. 신분제 사회 속에서 뿌리내린 가부장제 가족사를 여성학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까지 추구해 왔던 사회학적 관점과 대안을 우리의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가부장제와 분단을 극복하는 열린사회 평등 사회로의 발전을 추구한다.
 
이 민족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으리라 꿈꾸었던 과제를 하나하나 좇아다닌 것이 사회학적 관심이 되었고, 그 관심의 결과로서 현실에 적합한 대안을 찾아 직접 실천하고자 시도했던 이효재 선생. 그가 있었고 또 스승의 삶을 반영하며 살고자 했던 제자들과 후학들이 20세기를 살고 있었다. 그들이 분출했던 힘이 한국 여성운동의 물꼬를 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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