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자, 뭘 써야 할까?

이춘아 2020. 10. 11. 06:47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 소설가](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16


‘자, 뭘 써야 할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그의 작품은 ‘초기 쪽이 좋다’는 게 일단 통상적인 정설입니다. 나도 그의 작품 중에서는 처음 두 편의 장편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그리고 닉 애덤스가 나오는 초기 단편소설을 가장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숨을 헉 삼킬 만큼 멋진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기 작품으로 들어가면 잘 쓰기는 잘 썼지만 소설로서의 잠재력은 얼마간 떨어졌고 문장에서도 이전만큼의 선명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건 역시 헤밍웨이라는 사람이 소재에서 힘을 얻어 스토리를 써나가는 유형의 작가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자원해서 전쟁에 참가하고(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미국에서 사냥이며 낚시를 하고, 투우에 빠져드는 생활을 계속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외적인 자극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그런 삶의 방식은 하나의 전설이 되기는 하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체험이 부여해주는 다이내미즘은 역시 조금씩 저하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떤지는 물론 본인이 아니고서는 모를 일이지만,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타기는 했어도(1954년) 알코올에 빠져 1961년 명성의 절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에 비해 묵직한 소재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내측에서 스토리를 짜낼 수 있는 작가라면 도리어 편할지도 모릅니다. 자기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나 매일매일 눈에 들어오는 광경,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재로서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상상력을 구사하여 그런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스토리를 꾸며나가면 됩니다. 아, 이건 말하자면 ‘자연 재생 에너지’ 같은 것이군요. 굳이 전쟁터에 나갈 필요도 없고 투우를 경험할 필요도 치타나 표범을 향해 총을 쏠 필요도 없습니다. 

자칫 오해하시면 곤란한데, 전쟁이나 투우나 사냥 같은 경험에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의미는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경험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이내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소설을 쓸 수 있다, 라는 것을 나는 개인적으로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어떤 소소한 경험에서라도 인간은 방법 여하에 따라 깜짝 놀랄만큼 큰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부석침목’(浮石沈木)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소설 세계에서는 그런 역전 현상이 실제로 자주 일어납니다. 통상적으로 가벼운 것으로 취급되던 것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획득하고, 일반적으로 묵직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어느새 그 무게를 잃고 형해만 남습니다. 지속적 창조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시간의 도움을 얻어 그런 과격한 역전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소재가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약간만 시점을 바꾸면, 발상을 전환하며, 소재는 당신 주위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눈길을 받고 당신의 손에 잡혀 이용되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의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실은 그런 흥미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이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키포인트입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삼십오 년 전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선행하는 세대에게서 엄격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어쩐지 부담스러워서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본을 떠나 외국의 잡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데 뭐, 이렇게 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 그게 뭐가 나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째 좀 낯 두꺼운 소리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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