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중국 상해 가흥 항주 남경

이춘아 2019. 8. 7. 07:58

3.1운동 이후 백년,  민주공화제의 실험

 

 

이춘아 (2019.4.8 ~ 4.12 상해 가흥 항주 남경, YMCA 평화순례  참가)

 

여행이란 무엇인가, 공부란 무엇인가? 가끔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 조금이나마 정리되었다. 공부는 나의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찾아가면서 나름의

단어들을 내재화하면서 깨닫게 하는 것이고, 여행 역시 단편적으로 기억한 단어들을 연결시키고 상상해왔던 이미지들을 새롭게 다시 그려나가는

것이라고 정리해 보았다.

 

임시정부를 따라가는 평화순례 참가의 발단은 이렇다. 지난해 2018년 6월 원주의 토지문화관을 다녀오면서 토지 2부 만주편을 사두었던 것을

읽어보리라 마음먹었고 읽다보니 20권 전체를 e북으로 사서 읽었다.

 

압록강두만강 답사를 두번 다녀오고 길림과 하얼빈도 다녀온 후라 토지의 장면장면이 그려지듯했다. (작가 박경리 선생은 그곳을 가보지도 않고

소설을 썼으니 대단한 상상력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난뒤 계속 잔상으로 남아있었던 사람이 이상현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상현이 나오는 대목에서 그런

인간에 대한 한심함과 짜증이 나곤 했는데 소심한 지식인의 전형같은 인물인 이상현은 이런 저런 상황에 연루되어 소설의 전편에 걸쳐 나온다.

진주에서 일본에서 서울에서 만주에서 소설 주인공 언저리에, 독립운동가들의 언저리에서 고뇌하고 자포자기하는 인간유형이다. 그런 인물이 잔상에

남아있었고 작가는 왜 그 인물을 계속 달고 다니는지 박경리 선생에게도 불만이었다.

 

오래전 토지를 읽을 때는 사랑 중심으로 읽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조선말기에서 근대화를 거치면서 신분에 대한 계급갈등이 어쩌면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화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쌍놈의 새끼'라는 말은 욕 중의 하나인줄로만 알았다. '쌍놈의 새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욕중에 가장 큰 욕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토지는 동학혁명에서 일제하 항일운동 시기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그러나 현실의 벽은 의외로 배운 것 이상으로 벽이

높았기에 소설의 모든 인물들이 절감하는 현실이었다. 그 벽에서 가장 문학적 감성을 가진 이상현이라는 인물.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간

존경받는 어른인 아버지를 닮지도 못해 괴롭고, 운동의 노선에 이도저도 합류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못나 괴로운 인물. 그 인물이 독자를 붙들고

있었다.

 

만주관련 책을 읽다보니 신채호 선생도 읽고 이광수의 만주여행기, 소설 유정도 읽고, 백범일지도 읽게 되었다. 백범일지에 백범이란 호로 바꾸게

된 것에 대해 김구 선생은 이렇게 쓰고 있다.

 

........굳은 의지를 다지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라 하고 호를 백범이라 고쳐 동지들에게 알렸다. 구를 구로 고친것은 왜의 호적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것은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로 하여금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 달라'고.....

 

 

김구 선생의 호 '백범'이 흰호랑이인줄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그동안 토지에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꿰어졌다. 김구 선생 역시 상놈으로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가 높았기에 기라성같은 신분의 양반계급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있을 수 있었다.

 

1919년 3월29일 상해로 망명하면서 임시정부에 가담한 김구선생은 처음에는 경무국장의 자리였다. 임시정부를 경호하고 밀정들을 색출해내는

일들이었다. 아마 지식인이자 양반계급이었을 임정요원들은 이미 항일 전력을 가지고 있고 당시에도 적지 않은 나이인 44세의 김구 선생에게 어떤

자리를 줄지 고민했을듯 하다.

 

임시정부가 혼란을 겪는 동안 노선싸움으로 모두들 떠나고 난 공백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김구선생은 임정수립 이후 8년이 지난후인 1927년이

되어야 국무위원에 선출되고 1929년에 상해 교민단 단장이 되고 1930년 이동년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1931년 한인애국단을 창단하면서

이봉창 의거 계획을 세우게 된다.

 

우리가 아는 김구 선생의 위치는 임정수립후 10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격변기이었기에 그리고 독립운동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았기에

가능했던 시간이라 생각된다.

 

김용옥 선생의 인터뷰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왕정제에서 공화제로의 넘어가는 분수령이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정리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는 각종 문서에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인지했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3월 고종황제의 장례식은 오래된 왕정제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반 상놈 백정 신분제는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구습이기도 하다.

 

(1999년 남편의 안식년으로 미국에 일년 가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밖에서 놀고 와서 하는 말이 "쌍놈이

뭐예요?" 라고 물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물으니 한국애들과 미국애들이 패싸움하는데 미국애들이 "쌍놈아"라고 하더라는 것. 한국애들이

어른들에게 들었던 욕을 미국애들과 싸울때 써먹었는데 미국애들도 사용했던 것. 한국에서는 쌍놈이라는 욕이 이미 사라졌음을 그때 알게됐다)

 

 

평화순례를 가기 얼마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해왔던 정정화의 [장강일기]를 읽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글이었다. 남성들의 글이 역사적 연대기에 오를 사건 중심이라면 여성의 글은 당시의 생활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상해 가흥 항주 남경을 다녀오면서 정정화의 이름은 없었다. 가족 사진 중의 한명일 뿐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임정 어른들을 챙겼던 값진

삶의 기록은 정정화선생 본인이 글을 남기지 않았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로만 알려져 있는 그 여성의 이름은

곽낙원이다.

 

곽낙원, 정정화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찾아 이들을 소개하는 자료를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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