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의 인도체류기>는 인도 첸나이 SRM 대학 교환학생인 김영(대전 한남대학교)이 쓴 글입니다. 아래 글은 2011년 7월19일 인도도착일부터 쓴 글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싣습니다.
김영의 인도체류기 4 - 인도 친구의 집
2011. 8.15
어둡다, 밤이라서 어두운 것인가? 시간은 10시를 넘겼다. 아니 그래도 나는 같은 반 친구의 집에 놀러 와 있고 온 가족이 모여있는데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는가? 기다리던 도중 친구의 어머님으로 보이는 실루엣의 여성이 비상용 전등을 키며 정전이 났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나보고 저녁 밥 먹으러 거실로 나오라고 한다. 이 상태에서 밥을 어찌 먹으라는 건지. 어쨌든 거실에 앉아 잠깐 기다리니 눈이 어둠에 적응하며 여러 사람의 실루엣과 시선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 싸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밥상 실루엣은 아직이다.
온 가족과의 대면은, 특히 친구 아버님과는 지금이 처음이다. 정전으로 어두워진 거실에서 첫 대면이라니, 드라마틱한 것 같기도 하면서 상황이 안쓰럽다. 친구가 이제 아버지께서 질문을 하실 테니 준비하라고, 결국 긴장하고 있으라고 말한다. 분위기를 보니 상견례가 따로 없다. 거기다 풍기는 이미지는 사뭇 진지하기 까지 하다. 올챙이배를 가진 실루엣의 남자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 실루엣의 주인공이 아버님인가 보다. 내가 질문에 답하면 친구는 내 영어답변을 힌디로 통역하여 올챙이배의 실루엣, 아버님에게 말한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날카로움은 계속된다. 인도로 가겠다고, 국제 교류원에서 인터뷰 할 때보다도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래도 웬만한 질문에는 이미 내공이 쌓인 나였고 잘 풀어 나간 느낌이다. 아버님께서는 질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조언들을 해주셨다. 조언도, 질문도 떨어진 잠깐의 고요함에 얼른 방으로 들어가 준비하였던 선물을 가지고 나왔다. 어색한 고요함을 대비해 지금까지 숨겨두었던 카드다. 선물은 부채였고 다들 좋아하신다. 부채는 온 가족의 손을 타며 내 한 바퀴를 돈다. 결국 어머님 앞에 오자 어머님은 고이 접어 다시 박스에 넣는다. 나는 보관용으로 드린 건 아니었는데, 결국 서랍에 잘 넣어두신다. 포장박스도 고이 접으시는 모습을 보니 쓰실 것 같진 않을 것 같다. 이 후 밥이 왔다. 다 같이 먹는다. 친구만 치사하게 배부르다며 먹지 않는다. 나도 배부른 건 마찬가지인데. 가족들은 비상용 전등과 촛불에 의지하며 밥을 먹는다. 메뉴는 쌀밥과 묽은 카레 류다. 손으로 잘 드신다. 나도 손으로 먹기를 도전한다.
문화를 배우겠다고 인도로 왔다고 질문 때 말했으니 숟가락이 눈 앞에 있음에도 손으로 먹을 수 밖에. 미안하지만 맛은 그냥 그렇다. 친구가 손으로 어떻게 먹는지 알려준다. 가족들이 보기엔 내가 손으로 먹는 것이 서투른 모양인가 보다. 어느새 가족들은 그릇을 비웠고, 손이 더딘 나만 다 못 먹고 있었다. 결국 나는 모이를 먹는 동물원의 원숭이마냥 시선을 받으며 주섬주섬 먹는다. 내 옆에 있던 꼬마숙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숟가락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내 밥을 손으로 잡기 좋게 모아준다. 기분이 묘하다.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는다. 귀여운 아가씨다. 가족들이 웃자 집 나갔던 불이 다시 들어왔고, 천장의 선풍기들도 돌기 시작한다.
인도에 와, 인도인 친구에게 집 초대를 처음 받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집에 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사실상 놀러 가는 것이지만 긴장되고 설렌다. 나름 집에 가서 며칠 지낼 생각을 하니, 스타일위주의 옷보다 실용성을 따져 옷을 골랐다. 친구가 기숙사 앞에서 다 챙겨왔냐는 표정을 지으며 태평하게 기다리고 있다.
Chennai에 살고 있는 친구라 전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학교 앞 전철역에 가니 내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수의 친구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친구는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를 전부 시켜주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 못 할 것이라는걸 알고 있다. 얼굴도 기억 못할지도. 그래도 인사를 나눈다.
Chennai에는 이미 전철을 타고 한번 고생해봤기에 전철 안에서 친구가 양보하면 거절하지 않고 모른 채 앉는다. 그래도 이번에는 중간에 환승을 하여 갔기에 중간부터는 다들 앉아서 갔다. 우린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며 간다. 기차상인이 Chennai 지도를 팔기에 갖고 싶다고 하니 친구들 중 한 명이 대신 사줬다. 덕분에 지도도 생기고 친구 이름도 기억한다. Ram이라는 친구. 알고 보니 같은 반 친구였다;
마지막 종착역인, Beach station에 도착해 역전 앞 오토 릭샤를 타고 친구 집에 가는데, 인도인끼리 흥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흥미로웠다. 외국인에게는 얼마나 더 높게 부르는 걸까. 친구가 부모님께 내가 집에서 며칠을 보낼 것이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잔다는 것도 아니고 온다는 말 자체를 안 했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 이게 뭔가? 어쨌든 친구는 릭샤에서 어머님에게 전화를 해, 내가 간다는 것을 알렸다. 다행이 어머님은 흔쾌히 승낙하셨고 매우 excited하고 있다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원래 자기 친구들이 많이 들려 자고 가기 때문에 상관없다나. 나중에 보니, 식사니 간식이니, 내가 와서 따로 준비한 것과 신경 쓴 건 없었고 평소와 같은 식단과 패턴이었다. 괜히 우리가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으며 손님을 준비하는 것 아닐까? 이들처럼 간단히 배려만 해주면 될 텐데.
부모님은 빌딩을 가지고 있고 다른 방들은 렌트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전자기기 수입상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말을 들으니 한국에 있는 동규라는 친구와 비슷하게 산다, 적어도 중상층은 되지 싶다. 한국이나 인도나 룸 렌트는 돈이 꽤나 될 텐데, 하며 괜히 속물인양 쓸데없는 기대를 하였다. 막상 도착하여 집을 보니 빌딩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이미지고, 일층은 친척이 살고 있어, 렌트의 이미지와는 약간 달랐다. 그래도 충분히 중산층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도착하여 어머님을 뵙는데, 놀란 것이 핸드폰 사진보다 훨씬 젊어 보이셨다. 또한 젊게 사시고 계셨다. 나도 사용 해본 적 없는 블루투스 헤드폰을 쓰며 통화와 요리를 동시에 하고 계셨다. 나를 보더니 짧지만 반갑게 인사해주셨다. 뭔가 여운이 남게.
어머니가 스낵을 준비하는 동안 잠깐 집 구경을 해보니, 집안 자체는 넓지는 않았고 복잡한 동네라 시야는 조금 가렸지만 베란다와 옥상도 있고 넓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놀기 좋아 보였다. 친구는 지붕까지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도 찍어달란다. 참 보기 좋은 집이었다. 골목 가로수가 옥상을 살짝 덮어서 그런지 공기도 맑아 보인 건 인도의 평균적인 공기가 얼마나 나빴는지 돌이켜본다.
친구와 집 옥상에서 재미있는 설정 사진을 찍고 놀다 보니, 어머님이 해준 간식이 준비되어있었다. 친구는 Pure vegetarian 가족이라 육식을 안 하는데, 간식으로 내주신 음식은, 채식자라 하지만 짜이와 오이튀김을 그리고 알 수 없는 과일류의 튀김들이었다. 처음에는 고구마 튀김인줄 알았고 생각보다 맛은 나쁘지 않네, 이런 생각을 했었지만, 오이를 튀겼다는 소리를 듣고 놀랬다. 오이가 이 정도면 꽤나 괜찮다고 생각했다. 튀김은 전 형식보다도 튀김, 그것도 보통 튀김 같지는 않았다. 역시나 인도는 채식주의자라고 살이 찌지 않는다고는 말 못하겠더라. 인도인 만큼 간식도 역시나 손으로 먹었다. 짜이는 뜨겁기에 찻잔 받침대 같은 모양의 철 그릇?에 담아 식혀 마시더라. 음식도 뜨거우면 손을 못 쓰듯 차도 뜨거운 것은 싫어하나? 싫어한다면 열 전도율이 높은 철 컵을 쓰는 것은 또 다른 의문이다.
간식을 먹은 뒤,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은 변기칸과 샤워칸이 나눠져 있었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 친구 집에서 샤워를 하며 느낀 점은, 기숙사와 비교해 물이 다르다 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으면 수돗물이나 생수가 지역이나 브랜드 별로 다르다 라는 것을 잘 못 느꼈는데 인도는 차이가 엄청난 것 같다. 기숙사 물은 소금기가 있는 것처럼 비누 샤워를 해도 땀이 난마냥 끈적거리지만 친구 집은 그렇지 않았다. 같은 비누로 샤워를 해도 이렇게 다르니, ‘물이 다르다’ 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한국에서는 물이 다르다라는 말을, 친구들 사이에서 이성 집단을 판단하는 말이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물의 차이를 알고 다르다고 하는 건지 궁금하다. 노는 물이 다르다 라던지. 세상은 발전 할수록 물의 차이는 줄어들지만 현실은 양극화 돼가고 있으니 안타깝다. 우리나라 부자 중 80%가 상속인이라는 통계도 있으니 할말이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어깨 넓으신 분들이 나이트클럽 문 앞에서 물갈이를 해주니 고마운 일들 하시고 있다?
샤워를 하고 나니, 친구의 동생과 형이 보였다. 동생은 밖에서 놀고 온 것 같고 형은 대학교에서 방금 왔단다. 형이라 해도 나 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생김과 행동은 형은 형이었다. 형은 내일 프리젠테이션이 있다고 바빠 보였지만 괜히 뭘 배우냐고 물어봤고, 운 좋게 나도 저번학기에 배운 내용이라 약간의 도움을 줬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학문이 과목만 같다면 인도학생이 인도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뭔가 너무 글로벌화 되고 특징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든다. 각 국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같은 획일화된 인재들과 축적되는 지식, 이런 현실에서 차별화는 어떻게 두어야 할지 정확히 알기도 힘들지만 알아도 힘들 것이다. 동생은 동생답게 약간 유치하며, 개구쟁이 이미지였다.
침대에서 친구와 잠깐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어린 꼬마숙녀가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침대에 앉았다. 애는 일층에 사는 친척동생이라고 한다. 아무 말없이 나를 계속 말똥말똥 쳐다보니 내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 만나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형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색함을 즐기는듯했다. 어색함이 지속되자 친구도 이젠 안되겠다는 듯이 여동생에게 주사위로 진행하는 보드게임을 가져오게 했다. 보드게임은 친구와 친구 동생, 친척 여동생, 나 이렇게 4명이 진행했는데 게임덕분에 동생, 여동생과 어색함을 풀고 많이 친해졌다. 그들에게는 가까이서 처음대하는 외국인이지만 가리는 것 없이 다가와주어 고맙다.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모라는 분과 사촌동생이 또 와서 한동안 친구의 형의 과제를 도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내 소개는 딱히 안 했지만 어머님도 방에 들어와 내 이야기를 이모님과 나누셨다. 내 기숙사 이분의 일만한 방에 8명이 모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어수선하다. 그래도 명절이 아니지만 서로 화기애애하게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한 가족 같았고 어수선함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보드게임이 질려, 놀던 우리도 지치고, 형도 과제가 끝나갈 쯤 친구가 간식을 먹으러 나가자고 제안 했다. 시간이 8시 50분쯤으로 기억한다. 이 시간에 간식이란다. 더 재미있는 건 아무도 반대를 안하고 즐거워하며 나간다. 중간에 여동생의 오빠도 합류해 6명이 오토바이 3대로 간식전문 식당으로 향했다. 간식은 한국 기준으로 허름해 보이는 식당이었는데 Pani Pori라는 스낵을 주 메뉴로 하고 여러 가지 색다른 토스트 류 메뉴들을 팔고 있었다. Pani Pori가 제일 먼저 나와, 여동생과 나만 먹었는데 다들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동생이 어떻게 먹는지 먼저 보여주었고 같은 방법으로 따라 먹었는데, 정말 이건 아니지 싶은 맛이었다. 내가 먹은 Pani Pori를 설명을 하자면 일단 위생은 알 수 없었고, 한 입 거리의 속이 빈 뻥튀기 류 튀김 스낵에 잘게 썬 양파와 감자를 으깨어 양념한 덩어리를 넣고, 여기다 무슨 맛인지 모르는, 거의 양념 안 한 느지근한 묽은 물을 넘쳐 흐르도록 부어 먹는다. 물과 튀김과 샌드위치에나 들어갈 만한 으깬 감자가 만나니 내 식 감으로써는 감당을 못했다. 완전 부조화랄까. 이런 상태에, 매우 빠른 속도로 여섯 접시를 주니 진짜 토 안 한 것이 다행이다. 정말 맛도 맛이고 속도가 에러였다. 못 먹겠다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의 속도였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은 다들 정신 없게 맛있게 먹으니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맛 없다고 내 속을 훤히 말하기는 미안해 그냥 쓴 웃음만 지으며 당황해 할 뿐. 정신을 차리고 다른 이들은 뭘 안 먹나 궁금해 하기 시작했을 때, 이것 또한 처음 보는 토스트가 나왔다. 이 후에 여러 접시의 토스트를 먹었는데, 맛은 좋았지만 이게 간식으로 먹는 것인가, 의심할 만큼 많이 먹더라. 친구는 인도인은 원래 많이 먹는다고 말만 하며 먹었다. 딱히 나도 배불러 더부륵 한 건 몰라도 못 먹는 건 없으니 주는 대로 계속 먹었다. 20분은 앉아 먹은 것 같다. 시작은 힘들었고 중간은 맛있었고 마지막엔 걱정이었다. 저녁도 곧 먹어야 하니.
다시 돌아와 방에서 간식으로 꽉 찬 배를 쉬고 있으니, 방이 갑자기 어두워짐을 느꼈다. 정전인가?
질문과 저녁이 끝난 뒤 웃음소리와 함께 천장의 선풍기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가족은 이제 잠자리에 들기 위해 마무리를 시작했다. 가족들이 자기 전 세수를 할 때쯤, 나는 양치질을 했는데 어머님이 웃으시며 나에게 하루 몇 번이나 양치질을 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하루 세 번이라고 말했지만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며 뭐가 그리 웃긴지 이해하지 못하여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다. 친구는, 인도인들은 원래 밥을 먹은 후가 아니라 밥을 먹기 전에 양치질을 한다고 했다. 이유는 입안을 청결히 한 상태에서는 음식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어머님은 내가 총 6번은 양치질을 하시는지 아셨나 보다. 양치질문화를 보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음식에 대한 예의며 존중이다. 3주간 인도를 관찰하면서 나는 음식을 먹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도 못 봤고, 하물며 음료수를 길거리에서 마시며 가는 사람도 못 봤다. 또한 인도인이 음식을 존중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돌아보니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먹는 것도 음식과 최대한 하나가 되어 음식에게 대할 수 있는 최대의 존중 아닐 까 생각된다. 나이지리아 친구는 인도인들이 미개하여 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농담하지만 역으로 인도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제일 발달 한 것 아닐까? 관점이 다르면 문화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상대를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상대의 문화를 안다는 것은 상대의 관점을 안다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도인은 여행을 할 때에도 잠 잘 곳 보다는 먹을 것을 먼저 확인하고 중요시 한다는데 어떤 이유에서던지 간에 음식을 항상 존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먹은 뒤, 친구는 문자를 계속 누군가와 주고 받다 졸아 떨어졌고 동생과 형은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도 인도 여행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12시를 넘어 거의 마지막에 침대로 향했다. 친구 가족은 한 침대에 세 명이 일렬로 누워 잤다. 물어보니 원래 이렇게 조르르 누워 잔다고 한다. 형은 나 때문에 바닥에 내려가 자더라. 방에는 천장 선풍기가 있었고 자기 전 매우 강하게 틀어 놓아, 지붕이 날라갈 것 같았지만 방 안 공기자체가 더워서 그런지 선풍기 바람에도 더위는 식혀지지 않았고 땀이 계속 났다. 땀은 내내 계속 흘러 잠자리가 편안치는 못했다.
잠자리가 불편하여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났는데, 친구는 9시 가깝게 잔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날이 더워지기 전에 후다닥 챙겨 나왔겠지만 지금은 친구와 함께하니, 곤히 잠자는 친구를 여유롭게 기다리며 스스로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책을 읽었는데 모기만 없었다면 참 운치 있었을 것이다. 혼자 모기 때문에 베란다에서 어수선한 것 같다. 친구가 일어나고, 씻고, 옷 입을 때까지 소리 없이 잘 기다렸다. 뭐 인도가 느리지요, 하하하. 중간에 어머님께서 망고피클과 조밥처럼 생긴 요리를 해주셔서 아침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준비가 다 끝났는데도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한 마디 물었더니, 인도는 모든 일과가 오전 10시 이후에나 시작된다나. 그리고 짜이는 마시고 가자는 것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인도인의 여유로움을 느낀다.
기다린 끝에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Chennai 시내를 구경한다. Chennai의 바람도 맞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Chennai의 먼지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내 모든 구멍에 파고 들어온다. 정말 이 짓을 한 달 정도 하면 피부를 많이 상하겠구나 싶었다. 헬멧이 사고 났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피부를 위해 양보하세요. 오키나와 여행 때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는데, 정말, 차이가 크다.
처음 들린 곳은 Chennai 정부 박물관. 친구도 나 덕분에 처음 와봤다고 한다. 곁에 있는 것은 소중히 할 줄 모르는 것은 나나, 인도인 친구나 마찬가지다. 입장료는 내국인 15Rupee, 외국인은 250Rupee, 너무 차이가 큰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뭐, 작년에도 겪은 일이라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구원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학생은 입장료가 5Rupee라고 하여 인도 대학교 학생이라고 학생증을 보여주며 설득한 끝에 내국인 보다 값 싼 5Rupee를 내고 입장했다. 들어가보니 크고 볼 것도 많은 것 같았지만 역시나 나랑은 아직 맞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보는 내내 졸렸다. 친구에게 미안할 정도였으니. 느낀 점이 있다면, 인간은 적당한 훈련만 받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 그만큼 조각상 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같은 시간대에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견학을 왔다. 신은 왜 어릴 땐 귀엽게 만들었다가 크면 흉측하게 변하게 만들까?
두 번째로 들린 곳은 Chennai 중심부에 있는 St.Thomas 가 묻혀있다는 교회다. 친구에게 이 곳은 와봤냐고 물어보니, 이 곳은 고등학교 때 견학을 왔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는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기독교는 믿지 않는다고. 자신의 믿음에 엄격한 친구다.
교회소개는 딱히 하지 않겠다. 교회 뒤 도마가 묻혀있는 장소를 찾아갔더니 도마 마네킹이 묻혀있었다. 아, 그냥 기도 한번하고 나왔다.
교회를 들린 후 한인식당을 찾아 헤맸지만(친구가) 결국 못 찾고 근처 호텔 부설식당을 찾아갔다. 부설식당에서 친구는 중국식 볶음밥, 나는 북인도 전통음식 탈리를 먹었다. 내 음식은 90Rupee였고, 쌀밥은 무한 리필이었으니 호텔 부설식당치고 저렴하고 맛났다. 또한 탈리란 요리는 한국음식에 비교하면 백반이라 여러 가지 반찬?을 맛 볼 수 있어 좋았다. 맛있게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서빙하시거나 일하시는 분들이 온통 웨이터 일색이었다. 여기엔 한 명의 웨이트리스도 일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기술을 가진 여자들은 사무실에서라도 일 할 수 있지만 기술이 없는 여자들은 한국에선 흔한 웨이트리스조차 하기 힘들다니 안타까운 인도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관점이 다른 나 혼자 의 생각일 수도 있고, 인도 여자들은 당연하게 느낄지 모르겠다.
맛있게 밥을 먹은 뒤, 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는데, 진짜 집에 가서 샤워도 하고 낮잠도 푹 자고 정말 말 그대로 쉬었다. 한 2시간 안되게 쉬었나, 친구가 Chennai 바닷가에 가자고 한다. 그래서 바로 가방을 챙기고 거실로 나오자, 지금 말고 짜이 한 잔 하고 가자고 한다. 아 정말, 기도 찼지만 웃고 넘겼다. 나갈 때 어머님이 바닷가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가이드 북에서도 더럽다고 하니 그럴 생각이었다.
바닷가를 와, 해변길을 오토바이로 달려보니 정말 큰 해변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해변이라고 한다. 친구가 자신의 친구들도 해변가 어딘가에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어제 여기 있던 친구 중 하나랑 내내 문자를 주고 받은 모양이다. 바닷가에 가기 전 짜이 마시고 가자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만날 수 있게 할 작전이겠지? 해변가에 도착해보니 이미 어여쁜 여자애들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친구가 정말 외국인(나)을 데려와서 놀란 눈치였다. 여자애들에게 물어보니 가족 몰래 나온 것이라고 했다. 내 친구 역시, 여자 와 만나는 것은 부모님에게 비밀이다. 같이 찍은 사진도 인터넷에 올리지 말라고 할 정도다. 사실 내 친구들과 이 친구들은 내 나이또래가 되면 부모님이 짝을 지어주신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이성을 서로 못 만나게 하지만 이들처럼 반항?하는 아이들은 여기 Chennai해변가로 모이는데, 남녀 서로 다른 곳에서는 만날 상황이 못 되고 대신 넓고 인적이 붐비는 해변가에 자주 모인다고. 하지만 자주라 해봐도 삼 주에 한번 정도란다. 같이 놀면서 내가 느낀 것은, 특히 여자애들이, 간만에 만났음에도 또 헤어질 생각부터 하여 약간 슬픈 것 같더라. 운명을 받아드리지만 아쉬움이 남도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어라. 나에겐 하나의 추억이지만 그들에겐 잠깐의 탈출구겠지. 짧은 시간 동안 더 재미있게 못 놀아주고 질문만 물어봐, 미안할 뿐이다.
해변가에 관광용 말이 있었는데, 말을 타려고 하다가 말에게 맞아서 상처를 입었다. 꼬리로 그렇게 뺨을 후려 치더라, 결국 말을 타고 짧게나마 해변가를 돌아 다녔다.
해변가에서 발과 바지가 젖은 채 우린 친구의 가족이 믿는 Jainism temple로 향했다. Temple에서 또래 모임이 있다고 했다. Jainism을 말해본다면 한국에서는 ‘자인교’ 라 알려져 있다.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종교이고 나 조차도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로 한번 접해봤을 뿐이다. 자인교는 인도에서 파생된 종교 중 하나인데 이미지와 교리가 불교와 비슷해 보였다. 살생을 금하는 종교인 만큼 육식은 일체 하지 않으며 스님들은 입에 마스크를 써 말하면서도 죽일 수 있는 micro-organism을 보호한다고 한다. 오죽하면 모기도 잡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바르는 모기약을 사용하니, 모기에게 피해를 주지 안냐고 물어보셨다. 어쨌든 친구가 예배하는 모습도 보고 기회가 되어 여자스님을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좋은 배움을 얻었다. 스님께서는 나에게 채식을 요구하셨다.
예배 후 친구는 사원친구들과 모여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나도 옆에서 함께 했지만 힌디로 소통을 하여 딱히 무언가를 같이 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모임은 끝나고 After-party를 갔는데, 말이 파티고, 다 같이 모여 간식을 먹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모임을 갖고 이 후 항상 간식을 함께 먹는다고 한다. 장소는 정말 작은 스낵하우스였는데 내가 어제 먹었던, pani pori랑 여러 가지 종류의 스낵을 팔았다. 종업원이자 사장이신 주인장님께서 쉴 새 없이 간식을 만들어주셨는데, 한 접시가 나오면 4~8조각 내 하나씩 나누어 먹는 스타일이었기에 인도가 다 그렇듯 이것도 능동적으로 먹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서바이벌 형식의 스낵타임이었다. 뭐랄까, 초밥 집처럼 한 접시에 내주지만 개인이 가져와 먹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먹는 다는 점? 나눠먹는 정은 있지만 남겨 양보해주는 정은 없다는 점? 그래도 나는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나에게는 친구들이 먹을 것을 양보해주었지만 나 때문에 몇 몇은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접시를 기다렸을 것이다. 한 20접시 먹었나, 배가 부를 때까지, 더 이상 먹기 힘들 때까지, 대략 한 시간은 계속 먹은 것 같은데, 참 맛나게 잘 먹었다. 하지만 맛도 맛이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신선한 분위기와 신선한 방법이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던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무엇이 이런 분위기를 찾기 힘들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고 아쉽다.
정신 없이 먹은 즐긴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 씻고 잠을 청했다. 나는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쳤지만 자인교 집안에서 생명체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미 내 피를 빨아 부풀은 모기였기에 몰래 잡기도 힘들었다. 머리를 굴리다 그냥 천장 선풍기를 강하게 틀고 잠들었다. 모기가 다가오지 못 하도록.
아침이 되자 어머님께서 아침상을 준비해 주셨다. 메뉴는 ‘짜파티’ 라는 난 종류의 음식과 홈메이드 버터, 후식으론 인도식 라면과 짜이. 맛은 있었지만 내가 이 집에 있음으로써 살이 찜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머님이 하루 더 자고 가면 좋겠다고 하셔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친구 집이 좋긴 했지만 역시 손님이기에 집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집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싶다고 제안하니 다들 흔쾌히 승낙하며 바쁘게들 준비하셨다. 아버님은 세수와 옷을 갈아 입으셨고, 머리도 정돈, 마지막으로 분까지 얼굴에 바르셨다. 사진을 찍을 때 할머님은 안 나오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번의 사진 촬영을 위해 치장할 액세서리를 찾고 계셨었다. 덕분에 할머님과는 나중에 둘이서만 같이 찍었다.
원래 친구가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고 자기는 사원에 가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지만, 이래저래 아침을 즐기다 보니 늦어져 친구는 사원으로 바로 갔고, 친구의 형이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이것을 보시던 어머님이, 인도의 시간은 느리며 인도인은 게으르다고 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시간은 왜 빠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고, 여운이 남게 말하셨다. 왜 일까?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친구의 형과 함께 오토바이로 기차역으로 향하는 도중, 갑자기 아버지의 형 집에 가보고 시냐고 묻길래, 나는 당연히 그냥 집만 보여주는지 알고, 알겠다고 했고, 덕분에 친구의 큰아버지 집까지 들어가서 꽤 긴 시간의 대화와 스낵과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긴 시간의 대화의 이유는 큰 아버님이 날 집에서 안 내보내려고 했는데, 그 이유를 형에게 물어보니, 인도인에게 손님은 신이었고, 그만큼 대접하려고 하며, 신이 집안에 들어온 이상 쉽게 못나가도록 하는 것이 이유였다. 인사도 good bye는 잘 안 쓰고 see you later를, 나중에 다시 볼 기약을 하고 떠나 야 한다고 한다. 인도인의 가족들과 짧지만 함께 보내는 동안 마지막까지 참 많이 배운다. 이번 여행에서 친구 가족은 다 보고 오는 것 같다. 내가 사흘 동안 뵈었던 가족 분들 숫자만 세본다면 총합 16명이니, 신나게 만나며 보낸 것 같다.
인도 기차역에서는 화장실에 가려면 돈을 내야 하고, 기차 앞까지 배웅하려 하여도 Platform ticket을 구매한 다음 기차 앞에서 배웅할 수 있다. 인도인들이 얼마나 지키며 사는지 모르겠지만 공짜는 없는 나라다.
인도는 나라가 크다 보니 cultural diversity도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양하다.
사실상 비교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땅 크기와 인구수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렇다 보니 인도인들과 지역의 종교도 문화도 다양하다. 종교관련 공휴일만 봐도 한국은 석가탄신일과 크리스마스 정도이지만 인도는 숫자를 세기에도 힘들 정도의 종교공휴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힌두, 기독교, 불교, 자인교 등등의 달력도 다르게 나오는 이유다. 인도 정부는 어느 줄을 타야 할지 감이 안 잡힐 것 같다. 들어보니 State 마다 쉬는 공휴일이 다르다고 한다. 아마 비중을 어디에 더 두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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