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나폴리에서

이춘아 2021. 4. 24. 21:40

괴테, [이탈리아 기행 1], 민음사, 2004

1787년 2월26일, 월요일

‘카스텔로 광장 모리코니 씨 여관 전교’ 화려하고 밝게 들리는 이 주소만 쓰면 세계 어느 끝에서 부친 편지도 틀림없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다. 해변에 있는 커다란 성 근처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다. 사방이 집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광장이 아닌 광대한 토지라고 불린다. 아마도 여기가 아직 구획되지 않은 벌판이었을 적에 생긴 이름인 듯하다. 그런데 이 광장 한편에 커다란 가게가 한 채 튀어나와 있다. 우리는 항상 파도가 밀려오는 해면을 기분 좋게 내다볼 수 있는 이 집의 모퉁이에 있는 큰 홀을 차지했다. 철제 발코니가 창을 따라서 바깥쪽으로 둘러쳐져 있다. 심한 바람이 지나치게 몸을 파고들지만 않는다면 떠나고 싶지 않은 그런 장소다.

홀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특히 천장을 무수한 구획으로 갈라놓은 아라베스크 모양은 벌써 폼페이나 헤르큘라네움이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모두 아름답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화덕도 벽난로도 찾아볼 수가 없고 아무래도 2월이라 한기가 몸에 스며든다. 나는 몸을 좀 따뜻하게 하고 싶어졌다.

삼각대를 가지고 왔다. 그 위에 양손을 올리고 불을 쬐기에 꼭 알맞은 높이다. 넓적한 화로가 위에 놓여 있고 안에는 약간의 숯불이 피워져 있는데 위에 재를 덮어서 평평하게 해놓았다. 우리가 이미 로마에서 익힌 검약 정신이 여기서도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열쇠 끝으로 위에 덮인 재를 조금 치워서 불의 숨통을 터준다. 만약에 성급하게 불을 긁어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잠시 동안은 더 따스할는지 몰라도 순식간에 불은 다 타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화로에 불을 넣어 오게 하려면 얼마간의 돈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몸이 좀 편치 않아서 될 수 있으면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싶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는 것이라곤 돗자리 한 장뿐이었다. 모피는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장난 삼아 가지고 온 뱃사공의 작업복을 입기로 했다. 이것이 꽤 도움이 됐다. 특히 그걸 트렁크 끈으로 몸에 달라붙게 조여 매니 더 효과가 있었다. 그 모습은 뱃사람과 카푸킨 파 성직자와의 혼혈 같아서 대단히 우스워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친구를 방문하고 돌아온 티슈바인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2월27일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 쉬고 우선 몸의 회복을 기다렸다. 오늘은 비할 데 없는 경관을 실컷 즐기고 지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이야기하건, 그림으로 그리건, 이곳의 경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해변과 만과 후미, 베수비오, 시가, 교외, 성, 유락장! 그리고 우리는 저녁에 포실리포의 동굴에 갔다. 마침 저무는 태양이 반대쪽에서 비쳐 들고 있었다. 나폴리에 오면 모두들 머리가 이상해진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오늘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사물에서 특별히 불멸의 감명을 받았다는것을 곰곰이 생각했다. 유령을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즐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는 노상 나폴리를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불행해질 수 없었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내 식대로 태연하게, 주위가 아무리 열광하고 있을 때에도 다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따름이다.


3월 1일

이미 로마에 있을 때부터 나의 온고하고 은둔자적인 기질은 좀 싫어질 정도로 사교적이 되었다. 원래 세상으로 진출하면서 고독한 채로 버틴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나는 오늘 베수비오 등산을 할 생각이었는데 티슈바인이 나에게 동행할 것을 거의 강제로 권했다. 산책은 그 자체로서도 쾌적한 것이기도 하려니와 좋은 날씨에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교양 있는 후작과 동행한다면 필시 많은 기쁨과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데다 우리는 이미 로마에서 남편과 후작 곁을 맴도는 아름다운 귀부인을 보았는데, 그 부인 역시 일행에 참가한다니 그처럼 유쾌한 일도 없을 듯했다.  후작은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피게니에’의 일이 머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어느날 밤 상당히 소상하게 그걸 이야기해 드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해를 가지고 들어주었으나 더 발랄하고 강렬한 것을 나한테서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고 해도 곤란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아무런 군말이 필요 없을 만큼 마음을 매료해 버리는 책을 한 번 읽은 것이, 전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나중에 다시 읽거나 열심히 성찰하더라도 거의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의 효과를 일찍이 결정하고 말았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전에 [사쿤달라]를 읽었을 때 같은 것이 일례다. 그렇다면 뛰어난 사람을 만났을 경우도 역시 같지 않을까. 포주올리가지의 배 편, 마음 편한 마차 여행, 천하의 명승지를 지나는 명랑한 산책, 머리 위에는 맑은 하늘, 다리 밑에는 위험천만인 지면, 보기에도 무참하게 황폐해진 천고 영화의 흔적, 끓어오르는 열탕, 유황을 분출하는 동굴, 초목이 자라지 않는 용암 산, 불쾌한 불모의 지역,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금과는 딴판인 사시 울창한 식물이 한 치의 땅이라도 틈새만 있으면 무성하게 자라서 모든 죽어버린 것 위를 뒤덮으며 호수나 계류 주변을 둘러싸고, 나아가서는 오래된 분화구의 벼랑에까지 가장 훌륭한 참나무 숲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자연의 사상과 민족의 유적 사이를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다. 사색에 잠기고 싶어도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는 사이에도 살아 있는 자는 즐겁게 살아가는 법이어서, 우리 역시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양 있는 인물들은 현세와 현세의 본질에 속해 있으면서도, 또한 엄숙한 운명의 경고를 받으면 성찰에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땅과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한없는 조망에 넋을 잃으면서도, 또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 버릇이 되어 그 상태를 즐기는 사랑스러운 젊은 귀부인 곁으로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온갖 도취 속에 있으면서도 나는 몇 가지 일을 적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이용되었던 지도와 티슈바인의 간단한 스케치는 장래의 원고 정리를 위해 더없는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은 이 이상 조금도 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