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일본문화답사기(2005)

이춘아 2019. 8. 5. 16:48

지난간 자료를 보다 예전에 썼던 답사기가 있어 올립니다. 

2005년도 답사기임.


일본문화답사기 

특별한 일탈로서의 춤 축제

이춘아

 

이것은 무슨 느낌일까혼돈 그 자체의 미궁 속에서 나는 그 무엇을 정리해야만 했다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TV광고의 한 장면처럼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물벽(water wall)에 내 몸을 밀어 넣어 저쪽 세상을 보고 온 것 같은 느낌물벽이라는 통과의례를 톡톡히 치루면서 정신적 몸살을 겪었는데그 내면에는 일본에 대해 한국인이 갖는 보편적인 적대감과 선진국으로서 부러운 점이 내 속에서 섞이면서 일어나는 교묘한 감정들이 있었다.

 

그 어떤 호기심도동경심도 없이 막연하게나마 가보고 확인해보았으면 하는 기대조차 갖지 않았던 곳이 일본이었다그런데 왠일인지 올해 나에게 일본에 가게 되는 기회가 여러번 주어졌다그 가운데 나의 일정과 관심사와 맞아떨어진 것은 인류학자인 김양주교수(배제대학교)가 이끄는 한국과 일본문화교류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05 지역대학(community university)>참가였다.

 

87일부터 817일까지 1011일간 일본 동남쪽 시코쿠에 있는 고치현(高知縣일대에 머물며 축제에 참가하고 지역시설을 둘러보고  지역주민들과 밀착된 시간을 가졌다보통의 패키지 여행이 아닌 비록 열흘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잠자는 특별한 일상을 경험하였다특별한 일상 속에서 내가 참가한 축제만을 뽑아서 정리해본다.

 

<요사코이 마쯔리>라고 하는 춤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 12명의 일행은 한국에서부터 비디오로 춤 연습을 하였다우리 한국인은 유스하라팀에 합류하여 참가하게 되어있었다막상 일본 유스하라 지역에 도착하여 단체연습에 참가하고 보니 그 열기가 생각이상이었고 우리가 준비했던 연습으로는 도저히 함께하기 힘들 정도였다유스하라 기획팀에서도 다른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서라도 연습을 좀더 해서 참가해줄 것을 강권하였다우여곡절 끝에 짧은 기간동안 강행군한다고 한들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 몇몇은 나를 포함하여 자청하여 빠지고 스텝의 일원이 되어 참가하기로 했다.

 

도착4일째인 810일 드디어 유스하라팀 120여명은 유스하라 청사앞에서 간단한 출정식을 갖고 버스 세대로 나누어 타고 고치현의 고치시()에 2시간 걸려 도착했다. Saty라는 백화점 앞에 내렸다그곳이 유스하라팀의 첫 출발지였다그곳에서 구입한 일정표를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52회 요사코이 마쯔리 본부경연장출번표]를 구입하여 보는 순간 아연질색했다.

 

이 춤 축제는 52년째가 되었으며올해 출전팀의 수가 171개팀이며 팀별로 참가자수는 30명에서부터 150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춤축제였던 것이었다고치현외의 지역에서 참가한 팀도 31팀이나 되었다현 외의 팀 가운데는 북해도에 거주하고 있는 고치현주민회도 있었고 도꾜와 교토팀 등도 있었다고치현 전체인구수가30만명 가량 된다고 하는데 고치현 내 참가 주민 수만도 1만 3천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전체인구의 1/25 가량이 춤꾼으로 참가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숫자였다.

 

어쨌거나 본경연대회만도 이틀간 춤을 추는 요사코이 마쯔리 행사는 전야제에서부터 전국축제에 이르기까지 4일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었지만 고치현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춤꾼들 15 여명이 이틀간 오전11시부터 저녁9시까지 하루 종일 도시락 먹어가며 춤추는 축제였던 것이다이들 출전 팀들은 재래시장 상가에서부터 고치 옛현대식 아케이드 상가백화점 등의 짜여진 코스에 따라 이동하며 춤을 추었기에 관람객으로서 나는 인구 30만 소도시의 중심부를 돌며 다양한 춤과 복장관객들의 표정을 살피며 일본을 탐색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춤축제인 요사코이 마쯔리가 열리는 일정은 연평균 가장 덥고 비오지 않는 날을 택하여 진행한다는 것인데 올해 본경연일자는 810~11일이었다그것도 평일날 택하였기에 참가자들은 휴가반납과 2만엔 참가비를 내고 가장 무더운 날 혼신을 땀에 적셔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돈과 시간을 들여 땀 뻘뻘 흘리며 홀린 듯이 우리 한번 집단 춤에 빠져봅시다로 요약된다.

 

두 번째 참관했던 축제는 <고원(高原마쯔리>였다우리일행은 고치의 유스하라에 주로 머물렀는데 현재 인구 4~5천명에 이르는 유스하라 지역축제였다유스하라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정선 같은 깊은 산골이었다고원 마쯔리는 814~15일 열리는데, 14일은 전야제로 상가지역에서 30여개의 종목으로 야시장이 열려 먹고 마시고 구경하며, 15일에는 저녁6시부터 유스하라 지역의 7개 면()에서 20여개 팀이 참가하여 요사코이 같은 춤 행진을 벌인 다음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야시장을 벌여 먹고 마시며 지역주민들과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을 구경한다.

 

춤 행진은 동네를 몇 바퀴 도는 것이었는데유치원생에서부터 유스하라 직원팀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은 다양했다구경객중에는 노인치매센터정신지체장애인센터 등에서 버스타고 온 사람들이 모여앉아 구경하기도 했다요사코이 마쯔리도고원 마쯔리도 유사한 점은 평소 차가 다니던 도로를 사람들이 점거하여 해방공간이 된다는 점이다.

 

고원 마쯔리는 815일이 일본의 추석이라 할 수 있는 오봉기간이기에 귀성객들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14일 전야제인 야시장에서 우리일행은 포장마차를 열고 한국에서 준비해간 김치와 부침가루 등으로 김치부침개해물부침개불고기돼지불고기를 만들어 팔았고신라면조미 김 등을 팔았다우리 사물놀이 팀의 고객유치와 맛보기 서비스는 단순히 장사의 목적을 넘어서는 먹는 행위를 통한 문화교류라고 표현하고 싶다예상치 않았던 맛보기와 덤에 당황하면서 좋아하는 표정을 보면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표정에 흐뭇했었다

 

세 번째 참관했던 축제는 <다카토리 마쯔리>는 마쯔리 가운데 가장 소박한 주민잔치였다유스하라에서 솔개와 천연림계곡으로 유명한 다카토리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은 우리를 인솔했던 김양주 교수와 특별한 교분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교실3강당1샤워실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는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지역주민회합장소로도 사용하며 조리실을 개조하여 김치공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다카토리 김치는 동네 아줌마들이 만들어 시판하고 있었는데 한류붐을 타면서 전국적으로 배달되고 있다고 하며유명세를 타면서 다량판매와 다양한 상품개발의 귀로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이곳의 김치는 고춧가루만은 반드시 한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816일 저녁6시부터 열린 다카토리 주민잔치에는 우리일행을 포함하여 50 여명이 모여 먹고 마시며 한일간 문화교류를 하였다우리 일행은 제대로 복장을 갖추어 입고 가야금 병창과 사물놀이 연주를 하여 갈채를 받았고다카토리 주민들도 춤과 장기자랑을 보여주었다우리의 사물놀이 악기로 일본식 북소리를 내기도 하고 우리일행도 일본복장을 빌려 입고 그들의 춤을 따라 시연해보기도 하였다.  주민잔치를 위해 제공된 음식은 다카토리 아줌마들이 만든 김치김밥김치돼지불고기김치만두 이외에 돼지삼겹살냉채 등 일본음식이 준비되었고우리들은 잡채와 김치부침개를 조리실에서 함께 만들어 내어 놓았다.

 

한일간 문화교류라고 표현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이웃동네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노는 시간 같았다진정한 문화교류는 먹고 마시는 것을 포함하여 문화적 매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너와 내가 결국은 비슷한 인간 종()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그리하여 편안한 눈빛을 주고받는그러나 수틀리면 싸울 수도 있는 그러한 확인작업 같은 것쯤으로 정리해 본다.

 

 

 

일본문화답사기

人間關係에 하여

이춘아

 

1977년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였다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이제까지 고민해왔던 그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었다새로운 활력소로 세상을 인간을 탐험하였는데그 중 한 가지가 인간관계훈련을 집중적으로 시도하는 것이었다그 당시 대학생 졸업논문은 크게 비중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나로서는 상당히 노력 끝에 [encounter group에서의 facilitator의 역할]이라는 졸업논문을 썼다그 이후로도 10년 넘게 인간관계훈련과 성장상담 공부를 하였다아마 계속되었더라면 나는 전문상담가로 알려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나는 인간관계 훈련에 시들해지기 시작했었다그 이유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이번 2005년 여름 일본 여행을 계기로 되돌아보게 되었다.

 

<05 지역대학>교류프로그램을 위해 스케무라 선생님(이하 S선생)이 한국에 와서 우리와 이틀을 함께 하였다처음에는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이 프로그램을 위한 자원봉사자라고 하여 그런가보다 하였다단순히 우리가 방문하면 되는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과연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는 일본인인가 하였다그리고 87일 비행기로 일본에 도착하니 S선생이 개인승용차와 유스하라町 공공승합차로 우리를 마중하였다

 

우리가 머물 유스하라에서 松山공항까지 2시간정도 걸리고 밤늦은 시간인데도 마중을 와준 성의에 고마웠고한국에서보고 일본에 와서 다시 보니 반가웠다그리고 열흘을 우리일행은 S선생과 모든 일정을 함께 했다하루의 일정이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좀더 많은 시간을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어떤 날은 우리를 위해 아침식사 준비를 해주었는데음식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저렇게 하니까 처자를 떠나 유스하라에서 혼자 자취하며 살 수 있구나하며 넘겨 짚기도 했다그래도 그렇지 전날 밤늦게까지 우리와 이야기 하다 갔는데그 다음날 아무런 생색의 표시도 없이 덤덤하게 12명 우리일행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라니감동.

 

어쨌거나 나는 그러한 감동으로 열흘 밤을 매일 늦은 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그러다 여행 9일째 드디어 불만이 터져 나왔다. S선생의 집착 또는 집념과도 같은 끈질긴 대화에 우리일행은 피곤했고이제 그만 좀 일찍 자고 내일하자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그 불만은 여러 가지 것들이 겹치면서 나온 것들이다편한 여행에 익숙해있던 우리들에게 여기 와서까지 음식을 만들어 먹고만들어 팔기까지 하는 잡일(?)이 이제 지겨워졌던 것이다그리고 실제로 육체적인 피곤함이 쌓이면 짜증을 내기 마련인데짜증의 순서는 아무래도 체질순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일상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의 처리과정이 흥미진진했었다사람들이 대화로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를 지켜보았다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갈등구조는 매번 비슷하지만 흐지부지하거나 애매하여 그야말로 원수로다시는 보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었다갈등의 문제사태 과정에서 나는 김양주 교수님(이하 Y선생)과 S선생과의 오랜 지적 동반자로서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Y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지적 호기심에 의한 지적 놀음의 동반자로서 두 사람의 깊은 인간관계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일행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미용사 마유미를 비롯하여 우리일행과 만남을 당하도록 주선된 사람들(유스하라 중고등학생과 선생님들유스하라町長과 공무원시만토市長과 공무원신문사기자들지역유지들과 우리들의 민박집 주인들마쯔모토 할아버지다카토리 김치공방의 아줌마들우체국장 요시다한국말을 잘하는 사와다 등)을 만나면서 그동안  Y선생이 20여년에 걸쳐 닦아놓은 인간관계의 결과를 보았다.

 

그 인간관계의 모습에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태도는 없었다나는 어디가서 우리들을 그렇게 따뜻하고도 진지한 태도로 맞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를 생각해보았다나는 Y선생이 인류학자로서 지역연구를 하기 이전에 인간을 좋아하고 선입견 없는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떠나오는 마지막 3일을 우리와 함께 보낸 나쯔코는 아주 어릴 때 Y선생을 보아왔고, 5년 전 한번 보고 이번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변한 것이 없다고말하였다변한 것이 없는 사람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생각이 바뀌고겉모습이 바뀌고(늙어가고 있는 모습이거나 잰체하는 하는 모습이거나 등), 직업이 바뀌고... 그런데 이십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았다고 하는 저간에 인간관계의 핵심이 있다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모습이 있는데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Y선생의 아우라에 휩싸여 정말 모처럼 좋은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을 너무나 고맙게 여긴다공식적인 자리이거나 사적인 자리에서거나갑작스럽게 주선된 자리에서거나, Y선생과 S선생의 공덕으로 좋은 경험을 하였다공덕이란 표현을 하였는데정말 功德이라고 여기고 싶고 그 공덕을 우리도 전파하였으면 한다그러자면 나도 功德을 쌓아야한다.

 

앞에서 나는 인간관계훈련이 시큰둥해진 이유가 있었다고 하였다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훈련장에서는 인간관계가 되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의 장애요인으로 내 생각대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못한다는데나는 멍석 깔렸을 때는 잘했는데멍석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해졌다는 것이다그래도 그때 내가 배웠던 인간관계의 기본은 지키려고 애쓰는 편이긴 했지만 그 당시 추구했던 더 이상의 인간관계를 확대하고 살지는 않았다가이번 일본여행에서 새롭게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문화교류의 기본도 역시 인간관계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일본문화답사기 

가지 않은 길

이춘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성경구절에서 이 특별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깨달은 적이 있다그리고 老子의 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과 유사하다고 여겨 재미있게 대조하며 읽어본 적이 있다그 길과 와는 또다른 진짜 길을 언제부터인가 좋아하게 되었다길을 좋아하게 된 뒤부터 지도를 보면 그냥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가본 길에 대한 정감이 뒤섞이면서 들뜨게 된다.

 

길에는 사람의 흔적이 있다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재미있다일본 松山공항에서 자동차로 2시간여 도착한 숙소는 깊은 두메산골이었다산이 높다는 것과 별이 보이고 은하수까지 느껴지는 산골이라는 것쯤을 짐작하고 자고 일어나니 별천지였다우리가 묵은 숙소인 센마이다는 빗물로 유지되는 산등성이 논인 천수답(天水沓한가운데 있는 곳이었고천수답이 천개 있다고 하여 千枚田(센마이다)라고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천수답을 살려내기 위해 도농협약을 맺어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논마다 팻말이 있었는데,이름과 지역명이 적혀있다우리의 숙소는 이곳에 모심기나 벼베기 중간중간에 다니러 오는 도시사람들이 묵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꼼꼼하게 잔손질이 잘되어있는 천수답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일본을 보기시작하였다논 사이에 오래된 이끼낀 묘지석도 보았고 작은 개구리와 사마귀같은 벌레들도 보았다그리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길 옆에는 띄엄띄엄 집들이 있었다나와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집안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향기가 나길래 돌아보니 길가에 천연스레 백합이 피어있었다한참 길을 따라 올라가니 <板本龍馬脫藩>이라는 팻말이 내리막산길을 가리키고 있었다전설적인 용마가 뛰어내린 길인가보다 여기고 되돌아왔다더 가기에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板本龍馬가 사람이름이었고 脫藩은 을 이탈한 19세기 중반 일본의 維新혁명의 기수였음을 알게 되었다고치縣 곳곳에서 板本龍馬라는 이름을 볼 수 있었다요사코이 마쯔리를 보러 고치에 갔을 때 팜플렛에서 그의 생가박물관 등이 그림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고치시에서 자동차로 2시간여 떨어진 유스하라 지역에서 내가 본 <板本龍馬脫藩>팻말만 해도 네댓개는 될 정도로 문화상품이었다그 길을 따라 가서 어쩌겠다는 것일까그 길을 따라 간 사람은 모두 죽었다.  유스하라 중심지 높은 언덕에 維新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동상의 사람들 8명 모두 20~30대에 비명에 간 사람들이었다.

 

해발 220~1455m에 이르는 산간지방인 유스하라는 구름위의 마을이라 불리운다유스하라町 청사 옆 안내표지판에는 한글로도 구름위의 길이라 기재되어있다. 9년여에 걸쳐 이곳과 교류를 맺어온 덕분이다천수답이 있는 센마이다에서 3시만토市 민박집에서 2유스하라 중심가에 있는 若人交流館에서 5일을 묵었다그사이 우리는 松山공항에서 유스하라로유스하라에서 고치시로 고속도로와 국도를 따라 가면서 길옆의 집들을 보았다.

 

약간 대도시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는 고치 의 중심부를 요사코이 마쯔리를 따라다니면서 보았고그 다음날은 본격적으로 전차도 타보고고치의 옛과 도서관문학관 등을 훑어보며 공원에 앉아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그리고 역까지 걸어가 역에서 기차로 나까무라(최근 시만토로 통합된)로 이동하였다. 2시간걸리는 기차는 거의 완행열차처럼 역마다 정차하였다우리나라의 동해남부선 같았다바닷가마을을 스쳐 지나갔다.

 

(한국에 온지 며칠되지 않아 교회가는 길에 한자로 쓰여진 中村이라는 간판을 보았다나도 모르게 나까무라라는 발음이 나왔다대전의 중촌동(中村洞)이라는 이름이 새삼스럽게 일제시대의 잔재로 남겨진 지명일거라 추측하게 되었다.)

 

이틀을 나까무라시에서 민박하고 난후 우리를 위해 스케무라선생은 439번 국도를 따라 유스하라로 이동하였다그 길은 시만토강 하류에 있는 나까무라에서 시만토강 상류(源流라 불리는)에 있는 유스하라로 가는 길이었다국도라고는 하나 외길에 마주오는 차가 오면 비켜있다 지나가야하는 폭좁은 산길이었다내가 길을 좋아하고부터 알게 된 것중의 하나가 국도에는 인간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것이었다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자동차가 나오기 전자동차를 위한 길이 아닌 사람이 다니던 길이 국도였다.

 

시만토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439번 국도는 한달전 갔던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길을 생각나게 했다깊은 산길에 내려서서 스케무라 선생은 삼나무라 불리는 스기나무와 히노기나무를 구분하게 해주었고 이들 인공림으로 인해 생태계 파괴가 심각하다고 설명해주었다가파르게 경사진 산에 빼곡히 자란 인공림으로 인해 잡목들이 자라지못해 물을 품지못해 홍수피해가 일어나고나무를 간벌할 때가 왔지만 인건비가 따라주지 않아 악순환이라고 하였다유사한 종목의 스기와 히노기나무가 목재로도 좋고 겉보기에는 좋지만 단일종만으로 생태계가 파괴됨을 보여주고 있었다다양한 인종이 섞여살고키작은 사람과 키큰 사람이 섞여살아야 인간계도 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었다.

 

스케무라선생은 시만토강 댐건설을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동원되어 힘든 노역살이를 했던 댐이 있음을 설명해주었으나 그곳을 일정이 바쁘다는 핑계로 슬쩍 지나갔다산과 물그리고 길에서 우리는 를 생각하고 있었고 길을 가고 있었다.

 

일본문화답사기 

시만토 강은 흐른다

이춘아

 

5일째인 811일 고치 시에서 요사코이 춤 축제와 유적지 등을 보고 난후 기차로 나까무라 로 이동하였다시장님을 비롯하여 지역유지들의 환영회가 끝난 후 우리12명 일행은 4개 팀으로 나뉘어 민박집으로 흩어졌다밤길이었지만 우리 팀이 묵게 될 집이 강가에 있는 집임을 알수 있었다다음날 우리가 잔 곳을 둘러보았다어제 밤 한여름의 햇볕에 달구어진 나무집의 냄새가 너무 독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아침 서늘한 공기에 창가에 대나무가 보이는 강과 직접 인접한 멋진 경치였다.  우리가 묵은 곳은 차고 이층으로정확히는 카누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 이층건물이었는데 이 곳이 국제적인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었다이층 방에는 화장실과 싱크대가 갖춰 있고 나무 책꽂이에 책이 많았고 책꽂이 위에 이곳을 스쳐갔던 사람들의 글이 남겨진 공책이 있었다영어일어한국어 등 여러 나라 많은 사람들이 자고 갔던 집이었다

 

미야자끼라는 성을 지닌 이 집 아저씨는 목재상을 한다고 들었는데시의원을 지냈고 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분이셨다시장 후보로 나왔을 때 사용하였던 그분의 명함을 보았는데 그분의 캐치프레이즈인 듯한 <人間․ 自然>이 아주 작게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사진첩 등을  통해 그분이 시만토 강을 사랑하고 시만토 강의 환경보호운동을 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이 집의 거실은 특이하였다낮은 테이블이 길게 놓여있어 모임하기에 좋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환경문제 전문가들을 모셔다 이 거실에서 특강도 듣고 회합도 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음을 사진첩으로 알 수 있었다.

 

현관에는 <避村塾>이라는 현판이 놓여있어 OO처럼 이 집의 또다른 이름인가 하였는데 사진첩에서 무슨 회합을 하면서 이 현판을 들고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보아 <避村塾>이라는 모임이 아닐까 싶었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었다목재상을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게 집뿐 아니라 가구들이 온통 나무로 만들어져있었다화장실 바닥도 나무였고 심지어 상자에 대패밥을 모아두어 화장실 방향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늦잠을 배려해준 시즈꼬 아줌마는 우리를 강건너 음식점에 데려가 아침을 사주었다주먹밥 2개와 미소된장국계란후라이야채커피 한잔이 아침세트메뉴라고 하였다아침 먹고 낮모임에 갔다가 오후에 들어와 시즈꼬 아줌마는 우리에게 카누를 타라고 하였다.카누 2개를 강가로 끌고 내려가 수영도 하고 카누도 탔다내가 카누라는 것을 타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도 꾸지 않았던 사항이다얕은 강물에 수영하며 내 몸이 물결에 떠밀려가는 느낌이 너무 좋아 행복해 죽을 지경인데 카누도 타보라고 한다엉덩이가 끼일 정도로 카누는 폭이 좁았다물살에 카누가 떠내려가니까 시즈꼬 아줌마는 너무 놀란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떠 내려가고 시즈꼬 아줌마는 놀란 표정으로 뭐라고 소리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뛰어와 나를 붙들었다아마 점점 물살이 세어져 겉잡을 수 없이 떠내려갈 수 있는 지점이었던 모양이다.

 

맛있는 카레로 저녁식사를 준비해주었고 밤늦었지만 우리를 위해 다운타운으로 차를 몰고 가 할인점 같은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그곳에서 쇼핑도 하고 서점에 들려 구경도 하였다나는 여러 종류의 주간지를 읽으며 한류열풍을 느낄 수 있었는데, [주간 여성]등의 잡지에서 한국배우들을 읽었다어렸을 때 우리 집에 굴러다니던 [선데이 서울]같은 주간지를 읽는 것 같았다주간지마다 한국배우들의 프로필이 있었다번호까지 매겨져있다이름나이몸무게어느 고등학교어느 대학 등등 내가 잘 모르는 배우들까지 좌악... 듣던 대로 배용준 사진이 가장 많았다

 

다음날 이른 새벽 그 사이 익숙해진 시만토 강으로 슬리퍼를 끌고 산책을 했다카누를 끌고 갔던 강가의 자갈을 밟으며 걸어갔다슬리퍼는 그 집 것이었는데 내가 어려서 신던 고무슬리퍼와 꼭 같았다일본식 조리 형태의 고무슬리퍼를 그것도 일본 영향이 남아있었던지 많이들 신고 다녔다그것을 딸딸이라고 불렀다신고 걸어가면 딸 딸 거려 딸딸이라고 했는데.

 

자갈위로 물고기 한마리가 죽어있다물에 떠밀려왔다 다시 돌아가지 못했던 모양이다.시만토강의 특색 있는 다리를 걸어 몇번 왔다 갔다 하다가 다리 한가운데 지점에서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이른 아침이라 차들도 거의 지나가지 않았다.비가 많이 올 때면 잠기기도 하는 난간이 없는 다리(沈下橋라 부르고 있는데 우리의 잠수교 같은 다리)가 시만토 강을 더욱 멋지게 하고 있다난간이 없는 다리에 앉아 물결이 흘러오는 것도 보고 흘러가는 것도 본다흘러오는 물결들을 보고 있는 것도 벅찼지만 흘러가는 물결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서글프게 느껴졌다떠밀려가는 내 나이를 인식한 것일까.

 

[허드슨 강가에서 울었노라]라는 미국이민자의 애환이 담긴 책을 본 적이 있다왜 강가에서 울게 되는지 나는 시만토 강 다리위에서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흐르는 강물을 무심히 들여다 볼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가끔 강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지나가던 차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차를 세워놓고 걸어 오고 있다아름다운 풍광에 맘을 뺏긴 관광객들인지 사진을 찍어댄다이제 일어날 시간이다.어제밤 자전거 타면 좋겠다 라는 말을 들은 시즈꼬 아줌마가 창고에 넣어두었던 자전거를 어느 사이에 꺼내 놓았다일행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아 나는 또 다시 자전거를 타고 산책길에 나섰다강변 길은 자전거 타기에도 좋다자전거 구간이 이어지다 좀 더 멀리가니 자전거 길은 없어졌지만 더 가보았다무덤들이 곳곳에 있고(우리의 무덤형태가 아닌 비석들만이 모여있는음습한 기운이 도는 숲길도 있다한참을 가다 되돌아와 반대방향으로도 가 보았다강변 길에 집들이 곳곳에 있다어려서 보았던 시골집의 정경이다.

 

시만토 강은 흐르고 강가의 집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그들은 강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四万十 shimanto 라 불리는 이 강은 자료에 의하면 196km 길이로 시코쿠 섬에서는 가장 긴 강이며일본에서 가장 자유롭게 흘러가는 강으로 다양한 토착 식물군과 동물군이 서식하고 있으며많은 지역사람들이 이 강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문화답사기 

이방인의 눈

이춘아

 

다소는 이방인으로 이 땅에서 살기’ 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2000년 8, 1년간의 미국생활을 하고 돌아온 나에게 우리나라는 낯설었다낯설어버린 내 환경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다소는 이방인의 눈으로 좀더 거리를 두고 이 땅을 찬찬히 보고 싶어 그러한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2005년 8, 1011일 일정의 일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다소는 이방인의 눈으로탐색자의 눈으로 다시 우리나라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826일 토요일 저녁폐교 운동장에 열린 민족예술단 우금치의 개소식은 시끌벅적한 장터였다운동장 한 가운데는 가변 무대를 만들어놓고 한켠은 텐트를 치고 잔치국수와 돼지고기 수육김치막걸리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식사가 대충 끝나고 판굿과 열음굿 고사를 벌였고국악연주살풀이판소리가 이어졌다이러한 행사를 처음보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무심결에 관찰하고 있는 것을 느꼈고어쩌면 이러한 행사를 스케무라 선생을 비롯하여 친숙해졌던 일본 친구들과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폐교 운동장을 문화장터로 만들어 동네주민들과 초청손님들과 함께 어우러진 장면을 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일본에서 보았던 다카토리 김치공방이 있는 폐교 강당에서 열렸던 문화교류의 한마당그리고 유스하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던 축제와 겹쳐지면서 우리의 문화잔치마당은 이런식으로 판이 벌어진다고 보여주고 싶었다더구나 우금치의 개소식을 축하하기 왔던 출연진들은 최고의 춤꾼이었고 소리꾼들이어서 감동을 주었는데그들에게도 그 감동을 선사하고 싶었다.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 저녁 우금치는 이날과 같은 공연잔치를 벌이겠다고 공약을 했으니 일본 팀들이 왔을 때 참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827일 토요일하루종일 대전 중구 침산동에 있는 뿌리공원에 있었다해설사로서 근무하는 날이다. 2001년부터 해설사를 하면서 가장 기피했던 곳이다문화유적지도 아닌 관광지에 근무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는 지난달부터 한달에 한번꼴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7월 첫날은 산과 물이 있는 곳에 내가 무슨 복으로 삼림욕을 하고 있는 것인가싶어 땀 뻘뻘 흘리며 행복해 했었다두 번째날인 오늘은 일본에서 일본인 구경하듯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참으로 재미있었다유모차에 앉아있는 젖먹이 아이부터 꼬부랑 노인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산과 물을 찾아각종 씨의 유래비가 모여있는 뿌리공원에 내 씨 비석도 있나 싶어 확인하러 온 타지의 단체손님들로 그득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씨는 286개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265개 성으로 기록되었고, 1935년에는 250개 성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가 점점 늘어나 오늘날 286개 성씨가 되었다고 한다일본에서 보았던 각종 성씨가 떠올라 찾아보니 숫적으로 보아서 세계에서 첫 번째라고 한다복수가 보통이고 단자세자도 있다고 하며 같은 성씨라도 가문에 따라 여러음으로 불린다고 하며 현재 132천여 성씨가 있다고 한다.

 

오늘만 해도 버스로 단체손님들이 군산진주경주대구경북 의성에서 왔다사전에 확인도 하지 않고 돌진하듯 쳐들어와 왜 내 성씨는 없는가 항의하는 태도가 제각각이고 막무가내이다. 72개 성씨 유래비만 있는데 대체로 희귀 본관의 성씨들이어서 딱히 주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 자기 성씨가 있는 사람을 보면 내가 반가울 정도였다.

 

이 곳을 스케무라 선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일본에서 요사코이 마쯔리가 열렸던 축제의 공공장소에서 일본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내가 재미있어 했듯이이곳 뿌리공원에 오는 다양한 표정의 한국인을 한 장소에서 한꺼번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문화답사기 

’05 地域大學 community university

이춘아

 

일본 시코쿠 섬 고치내 유스하라町 고치市 시만토를 돌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곳을 방문하였다열흘동안 집약적으로 우리일행 12명은 특별한 일상을 경험하였다.

요사코이 춤축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고원 축제에서 부침개와 불고기를 만들어 팔면서 참여하는 방식으로,다카토리 김치공방에서 역시 부침개와 잡채를 만들어 함께 먹고 마시는 방식으로사물놀이와 가야금병창과 춤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일본 땅에서 일본사람들을 만났다집단참여의 방식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틀간의 민박으로 일본인들이 사는 모습을 깊숙이 들여다보았고 개인적인 친분을 만들어가는 개별참여의 방식으로 일본인들을 만났다어떠한 방식이었던간에 그것은 만남의 장의 연속이었는데그곳에서 나는 일본인 뿐아니라 함께 갔던 일행이었던 한국인도 새롭게 만날 수 있었고 또다른 모습의 나를 볼 수 있었다특별하였다는 표현보다는 각별했던 시간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더 구체적으로는 특별한 속에서 각별한 만남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지역대학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가 싶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모임에서 우리의 요구에 의해 추가된 일정은 지역의 복지시설과 문화시설 등을 보는 것이었다노인요양시설장애인복지시설중국한의학연구소두 개의 이 합병한 津野 町 청사내 복지시설(유아복지실조리실자원봉사실 등을)과 자연공법을 이용한 하천 복개공사다카토리 자연림지대시만토시와 유스하라정을 잇는 시만토강을 따라가는 439번 국도에서 본 인공림의 현장요시다 우체국장이 거주하는 집과 인근의 복지관(보건시설과 숙박공공모임을 겸할 수 있는), 팜 스테이를 하는 집시베리아 억류자 그리고 로지에 라는 네델란드인이 유스하라에 정착하여 만든 종이공방유스하라역사민속자료관 등을 보았다.이러한 시설 등을 통해 사람들은일본사람들은 어떻게 문화적 환경을 만들어가는가를 보았다.  꼼꼼하게세심하게섬세하게주의깊게철저하게 등의 단어로 정리된다.

 

나는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이러한 단어들은 창의성을 가로막는 것들이라고 여겨왔다나이 들어가면서 사람 사는 모습의 기본은 성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주지시켜주고 있다머리가 모자라면 몸이라도 부지런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사이 여행이나 답사는 거의 대부분이 박물관이나 미술관문화유적지 등을 다녀오는 것이었다사람 사는 모습과는 분리된 박제된 유품이거나 작품독립된 개체로서의 산물을 보아왔다적 탐구인간의 위대한 결정체진수 들 속에서 나는 예술품문화적 산물을 감상하고 더듬어왔다여행 틈틈이 이국적인 풍경이나 사람 사는 모습을 흘려보았고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연결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번 지역대학은 나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이 시간 속에서 우리와는 특별히 다른 일본인을 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유형의 사람 사는 모습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내 속에서 일어나는 두드러진 문화충돌은 없었다또 다른 문화적 형태를행태를 보았을 뿐이다어쩌면 중재자로서 문화통역이 있었기에 문화충돌은 완화되었는지도 감안하긴 해보아야겠다.

 

스케무라 선생이 한밤중에 던진 말, I don't know myself. 지역대학의 화두였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우리집 아이가 물었다. "엄마내가 뭐가 됐으면 좋겠어요?"  "몰라 나는 생각한 적 없다"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세요내가 뭐가 됐으면 좋을지"   "몰라자꾸 묻지 마라나도 내가 뭐가 돼야하는지 모르겠는데니가 뭐가 됐으면 하는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이 일로 우리집 아이는 내가 매정한 엄마라고 여기고 있다정말이지 나는 말할 수 없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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